떠나는 정몽원 회장 "아이스하키 역사 구석 한 페이지로 만족"
재임 8년간 한국 아이스하키 '르네상스' 빚은 '헌신적인 후원자'
"평창올림픽은 보람이자 긍지였다…후임 회장 서포트 잘하겠다"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나보다 훨씬 나은 회장이 나와서 한국 아이스하키가 계속 발전했으면 합니다. 난 (한국 아이스하키 역사의) 구석 한 페이지로 족합니다."
한국 아이스하키의 '헌신적인 후원자' 정몽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한라그룹 회장)이 28일 서울 강남구 슈피겐홀에서 퇴임식을 하고 8년간 지냈던 협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재계의 소문난 아이스하키 마니아인 정 회장이 재임한 8년간 한국 아이스하키는 '르네상스'를 맞았다.
한국은 2017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2부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사상 첫 월드챔피언십(1부리그) 진출의 쾌거를 이뤄냈다.
고교팀 6개, 대학팀 5개, 실업팀 3개밖에 없는 척박한 한국 아이스하키에서 일궈낸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었다.
'암흑시대'인 중세에서 벗어난 르네상스가 메디치 가문의 300여 년간의 지속적인 후원 덕분이었던 것처럼 '키예프의 기적'을 이야기하려면 정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2010년 세계 랭킹이 33위에 불과했던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는 정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지금은 18위까지, 15계단이나 순위를 끌어올렸다.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도 실업팀 하나 없는 열악한 현실 속에서 16위로 도약했다.
하지만 정 회장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뿌듯하게 여겼던 순간은 바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었다.
정 회장은 "올림픽은 내게 보람이자 긍지였다"며 "올림픽을 치러낸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난 행운아였다"고 말했다.
사실 험난한 과정이었다.
2011년 평창올림픽 유치가 결정됐음에도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은 한국 아이스하키가 평창에서 망신을 당하면 그걸 허락해준 IIHF도 곤란해진다는 이유로 한국 아이스하키에 개최국 자동 출전권 부여를 주저했다.
2013년 협회장으로 추대된 정 회장은 '올림픽 출전'을 지상 목표로 내걸었다.
안방에서 열리는 잔치에서 동계올림픽의 '꽃'인 아이스하키 종목에 한국이 못 나가는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정 회장은 믿었다.
정 회장은 외교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IIHF를 설득, 2014년 9월 남녀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평창올림픽 본선 출전권 획득을 이끌었다.
정 회장은 "2017년 세계선수권에서 월드챔피언십 진출이 확정되자 르네 파젤 IIHF 회장이 나를 만나려고 링크장을 가로질러서 뛰어왔다"며 "파젤 회장은 '다른 나라들이 반대할 때 한국을 올림픽에 참가시킨 내 결정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더라"고 웃으며 전했다.
그는 "2013년 11월 스위스에서 IIHF와 만나서 한국 아이스하키의 올림픽 출전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했던 첫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지만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뒤에는 협회 직원들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해보자고 말했다. 절대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며 "그렇게 마음을 하나로 모았기에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아이스하키 불모지였던 한국에 아이스하키 성장의 초석을 놓았다.
1994년 현재의 안양 한라 아이스하키단을 창단한 뒤 1998년 부도를 맞는 등 숱한 경영 위기 속에서도 아이스하키단을 지켜낸 일화는 유명하다.
26년간 한국 아이스하키의 선진화·국제화를 위해 힘써온 정 회장은 지난해 2월 5일 IIHF가 발표한 명예의 전당 입성자 명단에 아이스하키 발전에 공로가 큰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빌더(Builder) 자격으로 이름을 올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전 세계적 대유행으로 연기된 명예의 전당 헌액식은 6월 6일에 열릴 예정이다.
정 회장은 명예의 전당 입성이라는 영광보다는 그로 인한 혜택을 더 반기는 눈치였다.
그는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되면 특별 AD 카드를 받을 수 있다"며 "회장직에선 물러나지만, 국제대회가 열리면 특별 AD 카드를 갖고 더 많이 찾아갈 것"이라고 웃었다.
2016년 회장 연임에 성공한 정 회장은 평창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뒤 물러나겠다는 약속 그대로 후임자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퇴임한다.
한국 아이스하키의 성장에 정 회장의 지분이 절대적이었던 만큼 차기 회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한국 아이스하키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다.
정 회장은 퇴임 소감을 묻자 "만감이 교차한다"며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그만큼 좋은 순간도 많았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이 변하는데, 새로운 인풋(input)이 들어가야 한다"며 "나보다 더 나은 회장이 나와서 한국 아이스하키가 계속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 퇴임식에는 백지선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감독과 한라 선수인 조민호 등 제한된 인원이 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지킨 가운데 참석했다.
대형 화면으로는 대표팀을 거쳐 간 많은 선수가 화상으로 정 회장의 퇴임 길을 함께 했다.
정 회장은 한국 아이스하키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하지만 정 회장은 "난 한국 아이스하키 역사의 구석 한 페이지로 만족한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는 "단체종목의 경기력을 높이는 건 정말 누구 한 사람의 노력으론 어렵다"며 "국가적인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정 회장이 가장 아쉬워한 것도 재임 기간 아이스하키 전용 링크를 확충하지 못한 점이었다.
그는 "퇴임 뒤에도 협회 뒤에서 아이스하키 전용 링크를 늘리는 데 힘을 보태겠다"며 "회장직에서 물러나지만 한번 아이스하키인은 영원한 아이스하키인이지 않으냐. 한번 맺은 인연이니까 후임 회장의 서포트를 잘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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