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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스플 인터뷰] 강영식 “노 피어와 최동원 정신이 날 키웠다.”

일병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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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5 (목) 13:01

                           
-팀 위해 불펜 투수 변신했던 강영식
-은퇴 후 ‘경찰청 야구단 코치’로 지도자 변신
-어린 시절 좋아했던 최동원을 보며 ‘희생’의 참 의미 되새겨
-“강영식, 야구 똑바로 해!” 초등학생 야구팬의 한마디
-제리 로이스터 감독과 함께하며 배운 ‘노 피어’ 정신 이어가고파 
-‘초보 코치’ 강영식 “마음껏 던져라. 뒤는 내가 막을 테니” 
 
[엠스플 인터뷰] 강영식 “노 피어와 최동원 정신이 날 키웠다.”

 
[엠스플뉴스]
 
연일 상종가(上終價)다. 불펜 투수를 두고 하는 소리다. 사실이다. 수준급 불펜 서넛이면 가을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몸값 또한 선발 투수 못지않다. 
 
과거만 해도 불펜은 ‘험지’로 통했다. 등판 일정의 불확실성, 경기에 눈을 뗄 수 없는 고도의 집중력, 여기다 실점 후 찾아올 팬들의 눈총까지. 얻는 것보단 잃을 게 더 많은 자리가 바로 불펜이었다.
 
전 롯데 자이언츠 투수 강영식은 선발 투수를 원하는 여느 투수와 달리 젊었을 때보다 불펜에서 뛰길 바랐던 이다.
 
2003시즌을 앞두고, 코치님이 물었어요. ‘영식아 너 선발할래, 불펜 할래?’라고요. 그래서 말했죠. ‘불펜 하겠습니다’라고요. 그날부터 전문 불펜 투수가 됐습니다. 모두가 선발만 원하잖아요. 팀을 위해선 누군가 불펜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몸 상태와 역량을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결과는 성공. 강영식은 KBO리그에서만 18시즌을 뛰며 750경기를 소화했다. 그보다 많은 경기에 등판한 이는 KBO리그 사상 단 6명뿐이다. 
 
강영식의 야구는 끝없는 ‘희생’이었다. 음지에서 팀을 위해 던지고 또 던졌다. 현재 그의 왼쪽 어깨는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다. 선수 시절 수없이 수술대에 오른 까닭이다.
 
인터뷰 끝에 ‘불펜 투수가 될 걸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철완’ 최동원 선배처럼 되는 게 제 꿈이었습니다. 물론 선배님 발끝에도 닿지 못했지만, 그 정신으로 이 악물고 던졌으니 후회는 없습니다”라며 밝게 웃었다.
 
마운드 내려온 ‘랜디 영식’, 지도자 옷을 입다
 
[엠스플 인터뷰] 강영식 “노 피어와 최동원 정신이 날 키웠다.”

 
강영식은 올해 초,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경찰청 야구단 코치로 부임해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엔 ‘열공 모드’에 들어갔다. 내가 먼저 배워야 남을 잘 지도할 수 있단 게 그의 지론이다. 
 
경찰청 야구단 생활, 할 만합니까. 
 
프로와는 조금 다른 곳입니다. 아무래도 선수들 신분이 경찰이니까 야구 외적으로 지켜야 할 부분이 많아요. 지도자들이 선수들과 같은 숙소에서 동고동락한다는 것도 프로와는 좀 다른 면이죠.
 
마운드에 선 강영식의 이미지는 매우 강성(強性)이었습니다. 지도자 변신부터 다소 의외였어요.  
 
제가 그랬나요? 오히려 절 아는 분들은 더 독해지라고 하던데(웃음). 
 
그래요?
 
은퇴하면 지도자가 되자는 게 원래 제 꿈이었어요. 요즘 ‘육성’이 대세잖아요. 선수 시절부터 체계적인 육성 시스템에 관심이 많았어요. 더그아웃에 혼자 앉아 ‘한국을 대표할 투수 한, 두 명은 꼭 키워내겠다’며 실없이 웃은 적도 있습니다. 이제 꿈을 이뤘으니 좋은 성과를 낼 일만 남았어요.
 
올해 초, 갑작스러운 은퇴 소식에 조금 놀랐습니다. 
 
2017시즌을 앞두고 체력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젊은 투수들과 경쟁하려면 체력이 필수라고 봤죠. 하지만, 그런 조바심이 화를 불렀습니다. 몸 상태를 과하게 끌어올려 종아리에 무리가 왔어요. 이후 몸 상태가 좋아질 무렵엔 시즌이 끝나버렸고요. 한동안 하늘이 노랬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절친’ 정대현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겠군요. 
 
고민이 정말 많았습니다. 베테랑들에겐 특히 추운 겨울이었죠. 결단이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저 자신과 팀 모두를 위해 말이죠. 더 고집부릴 일이 아니었어요.
 
아쉬움이 남을 듯합니다. 
 
언제나 아쉬움이 남게 마련입니다. 18년 동안 입은 유니폼 아닙니까. 쉽게 벗어지지 않더군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한결 편해지더군요(웃음).
 
운명과도 같았던 ‘불펜 투수의 삶’
 
[엠스플 인터뷰] 강영식 “노 피어와 최동원 정신이 날 키웠다.”

 
선수 시절엔 유명한 불펜 투수였습니다. 
 
그저 꾸준하게 열심히 던진 투수라고 해주세요(웃음). 
 
현대 야구는 불펜 투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런 까닭에 ‘오프너(Opener)’란 신조어까지 등장했어요.  
 
요즘 MLB(메이저리그) 불펜 투수들을 보면 살벌함, 그 자체예요. 시속 150km의 슬라이더가 쉴 새 없이 떨어져요. KBO리그에도 뛰어난 불펜 투수가 많습니다. 보직이 정립된 덕분이에요. 투수들에겐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투수가 선발 보직을 원합니다. 
 
저도 처음엔 '에이스'를 꿈꿨어요(웃음). 하지만, 제 몸에 대한 확신이 선 뒤론 욕심을 내려놨습니다. 이후엔 코치님이 물으셔도 망설임 없이 ‘불펜’을 외쳤어요. 짧지만, 최고의 공을 던지잔 생각이었죠. 더 오래 야구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요. 
 
일반적인 결정은 아닌 듯합니다. 
 
당시 제 한계 투구는 50구 전⋅후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계 투구 수는 전력으로 던질 수 있는 공 개수를 말해요. 40구를 넘기면 팔이 굳기 시작했어요. 이후엔 정신력으로 공을 던져야 했죠. 회복 속도마저 남들보다 느렸습니다. 30구 이상 던지는 날엔 남들보다 하루는 더 쉬어야 했어요. ‘반쪽짜리 투수’란 말이 어색하지 않았죠.
 
그런 몸으로 용케 18년이 넘는 세월을 버텼습니다. 그것도 프로 무대에서 말이죠. 
 
자신의 몸 상태를 확실히 안단 건 정말 중요합니다. 그 작업이 선행돼야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어요. 덕분에 이런 팔로도 150km/h 속구를 뿌리곤 했습니다. 믿어지시나요? 간혹 제 경험을 후배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보직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가 빛날 수 있는 자릴 찾으라'고 말이죠.
 
도전해보지 않고 포기하란 겁니까.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란 말이 아니에요. 일단 선발이든 불펜이든 모두 다 경험해봐야죠. 도전은 한계를 초월하게 만듭니다. 저 또한 그랬고요. 비록 실패하더라도 나름의 경험을 얻게 됩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도전하면 돼요. 절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투수에게 보직 선택은 나름의 ‘특권’이에요(웃음).
 
“강영식, 야구 똑바로 해!” 초등학생 야구팬의 한마디  
 
[엠스플 인터뷰] 강영식 “노 피어와 최동원 정신이 날 키웠다.”

 
불펜 투수들은 대개 승부처에 등판합니다. 그런 까닭에 실점은 곧 팀 패배로 이어집니다. 스트레스가 상당할 듯해요.
 
그뿐이겠습니까(웃음).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어요. 불펜 투수들은 언제 등판할지 모릅니다. 경기 흐름을 따라가야 위기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날엔 두 번, 세 번씩 몸을 풀었다 말았다 합니다. 경기 중 불펜은 전쟁터와 같습니다. 
 
불펜 투수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느 정도의 ‘경험치’가 필요해요.
 
경험치라.
 
제 경우엔 500경기 출전 이후로 저만의 확실한 루틴이 생겼어요. 불펜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상황에 맞는 대처예요. 아무리 과학적인 분석을 들고 와도 어떤 상황에 따라선 무색해질 수 있습니다. 상대 타자의 단점을 노리기보다 제 장점을 극대화하는 게 나을 수도 있는 거죠. 또 상대 타자를 미리 설정하고, 머릿속으로 가상의 승부를 펼치는 것 또한 방법입니다. 그런 훈련을 통해 제 패를 숨겨 놓는 거죠. 그래서 경험치가 필요하단 겁니다.
 
반대로 구원에 실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말 그대로 비상이죠. 우선 팀과 동료들에게 정말 미안해요.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것뿐인가요.
 
아니요. 이제 시작입니다(웃음). 불펜 투수에겐 안보다 밖이 더 위험해요. 경기에 패한 날이면 구장을 제대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출입구부터 팬들의 눈총이 날아들어요. 욕은 기본이고요. 하루는 제 아들 또래가 저 멀리서 “강영식 똑바로 하라”며 소리를 치는 거예요. 그땐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서더군요.
 
불펜 보직을 꺼리는 이유가 있었군요(웃음).  
 
전 경기에 지면 새벽 1시 이후에 구장을 나갑니다. 팬들 볼 면목도 없고, 질타를 감당할 배짱도 없거든요. 그렇게 머리가 하얀 상태로 집에 가면 새벽까지 혼자 끙끙 앓아요. 한참을 멍하니 있다 보면 잠든 가족들이 하나, 둘 일어납니다. 그렇게 얼굴 한 번 보면서 '내일은 진짜 잘하자'며 스스로를 다 잡아요. 아마 불펜 투수의 흔한 삶 일겁니다. 사실 모든 야구 선수가 힘들어하는 부분입니다. 아, 딱 한 선수 빼고요.
 
그게 누굽니까.
 
(이)대호요. 우리나라 최고의 타자는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더라고요. 대호는 멘탈도 정말 강해요(웃음).

지도자 강영식의 무기 ‘노 피어’
 
[엠스플 인터뷰] 강영식 “노 피어와 최동원 정신이 날 키웠다.”

 
선수 시절엔 최고의 명장들과 함께했습니다. 
 
맞아요. 김응용 감독님을 시작으로 지금의 유승안 감독님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명장들과 함께하며 많은 걸 보고, 배웠습니다. 운이 참 좋았어요. 
 
그 덕에 만나는 감독마다 소위 ‘아들’로 통했습니다(웃음). 
 
아마 ‘김응용의 아들’이 그 시작이었을 겁니다(웃음). 
 
제리 로이스터 감독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을 듯해요.    
 
로이스터 감독님은 정말 특이한 분이셨어요. 인상적인 건 감독님 특유의 야구 스타일이었죠. 평소엔 다정하지만, 경기가 시작되면 야수로 돌변하세요(웃음). 감독님 야구는 정해진 규칙과 틀 안에선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게 특징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노 피어(No fear)’ 정신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 점들이 제 야구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떤 부분인가요.
 
감독님은 ‘힘의 효율적 분배’를 강조하셨어요. 특히 투수들은 매 경기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습니다. 불펜 보직은 그 강도가 훨씬 심해요. 감독님은 등판 스케줄을 미리 공지했습니다. 해당 경기에 등판할 투수를 정하면 무조건 그렇게 갔어요. 사소한 것 같지만, 투수들에겐 큰 도움이 됩니다. 
 
어떤 날엔 몸을 푸는 투구 수까지 정해줬어요. 10구면 10구로 끝내는 식이죠. 당시엔 감독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보통 충분히 공을 던져야 안심이 되는데 그러질 못하니 심적으로 불안했어요. 하지만, 그런 우려는 이내 확신으로 변했습니다. 투구 수를 줄이니 몸에 힘이 붙기 시작했어요. 힘을 축적해두니 경기 때 그 힘을 100% 발휘하게 되더라고요.
 
[엠스플 인터뷰] 강영식 “노 피어와 최동원 정신이 날 키웠다.”

 
노 피어의 숨은 힘이군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감독님은 언제나 ‘박스 인’을 강조하셨어요. 승부를 피하지 말고, 스트라이크를 던지란 겁니다. 어떤 순간엔 자신이 없었지만, “에라이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한복판만 공략했어요. 감독님은 제가 안타를 맞든, 홈런을 맞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오히려 제게 “헤이 영식, 나이스 피칭”이라며 박수를 쳐주셨죠. 신기한 건 그 이후였습니다. 박스 인이 몸에 익자 투구 밸런스와 구속이 좋아졌어요. 
 
‘박스 인’이라... 투수에겐 ‘양날의 검’ 아닙니까.
 
물론이죠. 저 또한 내적 갈등이 심했습니다(웃음). 하지만, 감독님은 그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는 확신을 주셨어요. 언제나 “감독인 날 믿어”라고 하셨죠. “난 안타를 맞든, 홈런을 맞든 상관하지 않아. 내 주문대로 하면 난 너와 끝까지 간다”란 말이 큰 힘이 됐습니다. 그간 어떤 지도자도 스스로 책임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서로 간의 신뢰가 쌓이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제 공에 대한 확신마저 생겼어요.   
 
가끔 그런 유대가 ‘혹사’란 결과물을 낳기도 합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혹사와 희생엔 분명히 차이점이 있습니다. 불펜 투수들은 언제나 ‘최동원’이 되겠단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팀이 원하면 언제든 희생하겠단 거죠. 그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투수들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확실한 팀 플랜을 가지고 정해진 규칙 안에서 등판 일정을 조율하고, 선수들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혹사란 리스크를 최소화할 방법이라고 봐요. 
 
강 코치의 노 피어엔 故 최동원 감독의 ‘희생’이 숨어있군요. 
 
최 선배는 단순한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팀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투수였어요. 요즘도 가끔 최 선배를 떠올립니다. 코치가 됐지만, 여전히 팀과 후배들을 위해 언제든 희생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노 피어’와 ‘최동원’이라. 강 코치에겐 무기가 많습니다.  
 
노 피어가 제게 영향을 준 건 사실입니다. 최 선배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할 순 없어요. 아직 더 배워야 합니다. 그간 제가 만난 여러 감독님의 장점을 제 야구에 잘 녹여내는 게 제 목표예요. 
 
강영식 “어떤 선수든 끝까지 책임지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엠스플 인터뷰] 강영식 “노 피어와 최동원 정신이 날 키웠다.”

 
선수들을 지도하는 일은 ‘9회 말, 2사 만루에 등판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거기에 ‘2스트라이크 3볼’을 추가하고 싶네요(웃음). 
 
‘풀카운트’군요. 
 
세상엔 정말 쉬운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도자는 항상 참고, 절제하는 자리더라고요. 어떤 선수든 아쉬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지도자는 그걸 어떻게 풀어내고, 전달하느냐가 중요한데 아직은 마음만 앞서게 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최근엔 선수들에게 “잘한다. 넌 할 수 있다”고 칭찬합니다. 아쉬움에 ‘욱’할 때도 있지만, 자제하려고 해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김응용, 로이스터 감독님 역시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요. 지도자에게 칭찬은 정말 좋은 무기 같아요.    
 
지도자로서의 철학이 확고해 보입니다. 
 
로이스터 감독님을 보면서 ‘메이저리그식 지도법’에 관심이 늘었어요. 지금도 계속 공부하고, 연구 중입니다. 선수들은 자신의 야구를 그라운드에서 표현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든든한 버팀목이 필요합니다. 선수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요. 모든 건 내가 책임질 테니 너흰 편하게 던지라라고 말이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공을 던지는 것. 새로운 시도를 겁내지 않는 것. 모두 누군가의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전 그런 선수를 끝까지 책임지는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당장 미국에서 러브콜이 올 듯합니다(웃음).
 
그저 작은 바람입니다. 아직도 구장에 가면 제게 커피 한 잔 건네는 팬들이 있어요. 잘난 것 하나 없는 절 아직도 기억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선수 때 실망을 많이 드렸으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죠(웃음). 이젠 더 좋은 선수를 키워내는 것으로 팬들에게 보답하고 싶습니다. 
 
전수은 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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