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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인 NBA 스타] 만리장성 야오밍, NBA에 피어난 아시아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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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3 (월) 06:44

                           

[줌 인 NBA 스타] 만리장성 야오밍, NBA에 피어난 아시아의 자존심!



[점프볼=양준민 기자]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고 오늘 필자가 소개하려는 이 선수는 국내 팬들에겐 다소 불편한 소재일지도 모른다. 바로 아시아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지만 한국대표팀에 있어선 통곡의 벽과도 같았던 ‘야오밍’이 그 주인공이다.

2002 부산 아시안게임, 한국대표팀은 연장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야오밍이 이끈 중국농구를 102-100으로 꺾고, 20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야오밍은 경기 시작을 앞두고 한국농구를 무시하는 발언을 남기며 한국 팬들의 공분을 샀던 야오밍은 서장훈과 김주성 등 국내 빅맨들의 육탄방어에 고전, 준우승에 만족해야했다. 4쿼터, 경기종료 46초를 남기고 88-81로 뒤지며 패색이 짙었던 한국은 쿼터 막판 김승현의 손에서 나온 2개의 스틸과 어시스트로 분위기를 바꾸며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 간 데 이어, 연장에선 서장훈의 3점포를 시작으로 포문을 연 한국은 리드를 끝까지 지켜내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허나, 기쁨은 여기까지였다. 이미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 앞서 NBA 진출을 확정지었던 야오밍은 이후 국제대회에서 한국농구를 가로막으며 중국을 아시아 최강으로 이끌기 시작, 중국은 아시아를 넘어 국제무대에서 세계의 강호들과 기량을 겨루며 성장해갔다. 야오밍도 2002년 NBA 진출 이후 실력이 일취월장, 어느새 샤킬 오닐과 드와이트 하워드 등 당대 최고의 센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등 그의 명성은 중국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반대로 한국은 레바논과 이란 등 중동세와 함께 중국농구의 급격한 성장세에 치여 아시아의 중위권으로 전락했다.

 

다시 야오밍의 얘기를 시작하자면, 그에 반해 NBA 선수로서 야오밍의 시간은 그리 길지가 않았다. 82경기나 되는 NBA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했고, 동시에 오프시즌이면 불타는 애국심으로 국가의 부름에 언제나 응하면서 야오밍의 몸은 점점 망가져갔다. 결국, 왼쪽 발의 부상이 점점 악화되면서 더 이상은 그의 발목이 거구의 몸을 버텨내질 못했다. 그 결과, 야오밍은 2010-2011시즌을 끝으로 팬들과 작별을 고하고, 현재는 화려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줌 인 NBA 스타] 만리장성 야오밍, NBA에 피어난 아시아의 자존심!

▲중국에 등장한 ‘괴물(怪物)’ 야오밍, 중국을 넘어 NBA 정복을 꿈꾸다!

중국 현지에선 야오밍을 ‘괴물(怪物)’이라 부르며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중국은 저우치(HOU)과 딩안유향(DAL) 등 이른바 야오밍 키즈들이 제2의 야오밍을 꿈꾸며 NBA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단순히 농구계에서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등 현재 중국에선 야오밍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야오밍은 국가적인 영웅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에 중국인들은 예부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영웅들을 신격화한 것처럼 야오밍의 업적도 신격화하며 그의 위상을 기리고 있다. 

 

1980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야오밍은 태어났을 당시 신장이 63cm에 몸무게가 5kg로, 이는 중국 평균 신생아들의 몸무게에 2배나 달하는 수치였다고 한다. 농구선수출신인 아버지 야오즈원(201cm)과 어머니 팡펑디(191cm)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야오밍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신체조건과 함께 농구실력을 뽐내며 사람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중국 현지 언론, 신민완보의 보도에 따르면 어릴 적 야오밍은 매일 하루에 닭 2마리를 먹고, 우유도 1.5L 2병을 마시는 등 엄청난 먹성을 자랑했다고 한다.

야오밍의 농구를 시작한 것도 바로 어린 시절 학교 농구부에서 매일 우유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야오밍의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아들을 일반 학교가 아닌 체육학교로 진학시켰다. 그러나 지금과 달리, 1980년대 중국에선 운동선수들의 처우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야오밍의 아버지 야오즈원의 경우, 상하이 농구팀의 주력선수였고, 어머니 팡펑디는 중국여자농구대표팀 주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경제적인 형편은 그들의 농구실력과 비례하지 못했다. 성장기에 엄청난 먹성을 자랑했던 야오밍은 늘 배가 고팠고, 결국, 우유 한 병의 유혹에 넘어간 야오밍은 9살이 되던 해에 농구부에 지원, 야오밍과 농구와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실제 야오밍의 아버지는 우유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친구가 운영하는 우유공장에서 매일 아침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 급여 대신 우유를 받아 야오밍에게 먹였을 정도로, 야오밍이 지금의 신장에 이르게 된 것은 유전적인 요인과 함께 유별난 우유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야오밍은 단순히 신체의 우월함으로 농구를 한 것이 아니라, 장신임에도 안정적인 볼 핸들링과 슈팅능력을 갖추고 있는 등 기본기까지 탄탄한 선수다. 야오밍이 탄탄한 기본기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초등학교 시절의 은사인 리장민 감독의 엄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야오밍은 10살이 되던 해, 그 키가 165cm까지 자라나며 우월한 신체조건을 자랑했다. 당시, 스포츠 전문병원에서 전문의에게 성장판 검사를 받은 야오밍은 의사로부터 그 키가 221cm까지 자라날 것이란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야오밍은 NBA 커리어 평균 83.3%(평균 6.1개 시도)의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 농구를 갓 시작한 야오밍은 기본기가 매우 부족한 선수였다. 이에 팀을 맡고 있던 리 감독은 야오밍에게 기본기부터 혹독하게 가르쳤다고 한다. 리 감독은 매일 정규훈련 후 야오밍과 나머지 훈련을 진행, 볼 핸들링과 사이드스텝 등 기본기를 반복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체력증진을 위해 등교 때 아버지가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을 금지, 대신 등·하교 시에 자전거를 이용하도록 권장했다는 후문. 2016년, 야오밍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면서 소감을 발표했을 때, 리 감독을 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은사로 칭하며 감사의 마음을 드러냈을 정도로, 리 감독은 야오밍의 농구인생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었다.

허나, 야오밍이 처음부터 농구에 흥미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계속되는 반복훈련에 지쳐가던 야오밍은 서서히 농구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며 본인의 실력이 늘고 있음을 알게 된 야오밍은 이후 자진해서 훈련에 매진했다고 한다. 또, 이때 라이벌인 왕즈즈까지 등장, 농구에 대한 야오밍의 열정은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당시, 야오밍이 중국 남부를 대표하는 유망주였다면, 북경 출신의 왕즈즈는 중국 북부를 대표하는 유망주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왕즈즈의 학교가 상해로 전지훈련을 왔을 때 야오밍의 학교와 친선경기를 가지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왕즈즈는 1977년생으로, 본래 야오밍보다 3살이나 많았지만 출생신고가 2년 늦어지는 바람에 야오밍과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농구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면서 실력까지 일취월장한 야오밍은 13살의 나이로, 프로팀 상하이 샤크스의 유소년 팀에 입단한다. 야오밍은 입단과 동시에 일요일을 제외한 일주일에 6번, 매일 10시간이 넘는 강훈련을 이어갔다. 실제로 입단한 지 첫 1달 만에 몸무게가 20kg 가까이 빠졌을 정도로, 훈련의 강도는 상상이었다. 당시, 야오밍의 훈련파트너는 바로 류웨이로, 둘은 매일 붙어 다니며 고된 훈련과 함께 농구에 대한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또, 휴식을 취하는 일요일엔 길거리 오락기 앞에 앉아, 하루 종일 아케이드 게임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었을 정도로, 두 사람은 농구 외에도 여러모로 통하는 것들이 많았던 단짝으로, 이후 프로와 국제무대에서 계속해 호흡을 맞추게 된다.

이렇게 4년이란 시간을 고된 훈련으로 보낸 야오밍은 17살의 나이로, 드디어 성인무대에 발을 들이게 된다. 처음 유소년 팀에 입단했을 때 193cm던 신장도 어느새 2m를 훌쩍 넘기 시작, 점점 지금의 신장에 이르게 된다. 데뷔시즌 야오밍은 평균 10득점 8리바운드 2.3블록을 기록, 준수한 신고식을 치렀다. 하지만 두 번째 시즌인 1998-1999시즌, 정규리그 개막을 목전에 두고 왼쪽 발이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으로 당해시즌을 통째로 결장했다. 이때부터 야오밍의 제자리 점프력은 부상후유증 때문에 10cm에서 15cm 사이로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어린 나이에 프로 데뷔에는 성공했지만, 그 이면에는 몸을 혹사시킨 대가로 프로 데뷔 2년 만에 피로골절이란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했다.

하지만 1998년은 야오밍이 NBA 진출이란 꿈을 꾸기 시작한 계기가 마련된 한 해였고, 그 결과, 한층 더 발전한 기량으로 1999-2000시즌 복귀했다. 야오밍은 1998년 5월, 나이키의 초청으로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농구캠프에 참가했다. 이 캠프는 미국을 포함, 전 세계의 농구 유망주들이 다 모인 자리였고, 여기서 야오밍은 타이슨 챈들러와 함께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NBA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 소식이 중국 국내에도 알려지면서 야오밍의 명성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챈들러는 2001 NBA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2순위로 LA 클리퍼스에 지명 후 곧장, 시카고로 트레이드됐다)

이후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국가대표팀 상비군에 이름을 올린 야오밍은 상비군에 함께 승선한 왕즈즈와 NBA 진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한 번 본인의 꿈을 확고히 다진 것으로 알려졌다. 야오밍은 본인의 자서전에 “NBA 진출에 대한 왕즈즈의 격려와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는 말로 왕즈즈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이미 1995년 프로에 데뷔, 신인왕을 수상하는 등 중국리그의 슈퍼스타로 떠오르고 있던 왕즈즈는 일찍이 NBA 진출을 준비 중이었다.

야오밍에 앞서 1999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했던 왕즈즈는 낙방할 것이란 전망과 달리, 2라운드 전체 36순위로 댈러스 매버릭스에 지명, 많은 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는 당시에 댈러스의 단장직을 맡고 있던 도니 넬슨의 강력한 의지가 만든 결과물이었다. 넬슨은 1993년, 왕즈즈의 플레이를 처음 보고, 그때부터 왕즈즈의 행보를 관찰했다고 한다. 일찍이 왕즈즈는 중국농구역사상 최초로 나이키 훕 서미트에 초청받은 것도 모자라, 조지타운 대학이 장학생 신분으로 스카웃 제의를 할 정도로, 미국이 주목하고 있었던 선수였다. 허나, 이를 모르고 참가에만 의의를 뒀던 왕즈즈는 소속팀과 NBA 진출에 관해 전혀 협의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결국, 왕즈즈의 NBA 입성은 2001년으로 미루어졌다.

비록, 왕즈즈의 NBA 진출은 좌절됐지만, 이는 야오밍이 본인의 NBA 진출가능성에 확신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 길고 긴 재활을 끝내고 코트로 돌아온 야오밍은 1999-2000시즌, 정규리그에서 평균 20.9득점 12.9리바운드를 기록, 데뷔 후 처음으로 평균 20-10을 돌파하며 상하이 샤크스의 주축 멤버로 거듭나는 등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줬다. 야오밍의 활약으로 상하이 샤크스는 1999-2000시즌과 2000-2001시즌, 두 시즌 연속으로 CBA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왕즈즈가 이끄는 빠이 로케츠에 가로막혀 준우승에 만족해야했다. 

하지만 2001년 여름, 왕즈즈가 NBA로 떠나면서 경쟁자가 사라진 야오밍은 2001-2002시즌 정규리그에서 평균 32.4득점 19리바운드 4.8블록을 기록,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끈 데 이어, PO에선 평균 38.9득점 20.2리바운드 4.3블록을 올리며 마침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필드골 성공률도 76%를 기록하는 등 이는 현재까지도 중국리그에서 깨지지 않고 있는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 더해 2001 아시아선수권에서 MVP를 차지하는 등 이미 아시아에서 농구로 이룰 것을 모두 다 이룬 야오밍은 2002년 여름, NBA 진출을 공식선언하며 또 한 번 미국농구의 주목을 받게 된다.    

[줌 인 NBA 스타] 만리장성 야오밍, NBA에 피어난 아시아의 자존심!

▲역대 NBA 최초 아시아인 1순위 야오밍, 편견과 싸워 NBA의 중심에 올라서다

당초, 야오밍은 2002년이 아닌 1999년, 왕즈즈와 함께 NBA 신인드래프트 참가를 추진했었다. 그러나 소속팀 상하이 샤크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 야오밍은 NBA 진출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뤄야했다. 그렇게 3년을 절치부심했던 야오밍은 2002년 여름, 오랜 기다림 끝에 2002 신인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NBA 입성에 성공했다. 신인드래프트 참가를 앞두고, 야오밍은 美 현지 에이전트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고용하는 등 NBA 관련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이들을 대거 초빙, 이른바 ‘야오밍 사단’을 꾸리며, NBA 진출을 심도 있게 준비했다. 

이미 당시의 야오밍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걸어 다니는 만리장성’이란 별칭을 얻으며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에 많은 팀들이 야오밍의 1라운드 지명을 심각하게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야오밍의 NBA 진출 걸림돌은 자국, ‘중국’이었다. 

상하이 샤크스는 이제 막 최전성기에 접어든 야오밍이 NBA로 떠나버리면 경기력과 함께 열기를 띠기 시작한 팀의 인기가 급격히 하락할 것을 걱정, 야오밍의 NBA 진출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마찬가지 중국농구협회도 자칫 야오밍이 오프시즌 국가대표팀 차출에 제대로 응하지 않을 것을 우려하면서 야오밍의 미국 진출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왕즈즈의 NBA 진출이 늦어진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허나, NBA 진출을 향한 야오밍의 확고한 의지에 중국농구협회와 상하이 샤크스도 끝내는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야오밍은 본인이 직접 상하이 샤크스 구단주과 면담을 진행, 구단으로부터 “합당한 조건에 NBA 팀과 계약이 가능하다면 NBA 진출을 허락한다”는 조건부 승낙을 얻어냈다. 중국농구협회도 야오밍의 비자발급을 막는 등 야오밍의 NBA 진출을 반대했다.

반대로 아시아 시장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던 NBA는 야오밍의 NBA 진출을 간절히 바라며 중국농구협회와 치열한 눈치싸움을 이어갔다. 결국, 美 현지에서 야오밍의 전체 1순위 지명이 유력하단 전망과 함께, 야오밍이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출전을 확약하면서 중국농구협회도 야오밍의 NBA 진출을 허락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중국농구협회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얻어낸 야오밍은 2002 NBA 신인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휴스턴 로케츠의 지명을 받게 된다. 

야오밍의 NBA 커리어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그건 ‘편견과의 싸움’일 것이다. 이미 신인드래프트 당일부터 美 현지 전문가들 사이에선 야오밍의 1순위 지명을 두고 갑론을박을 이어갔다. 반대의견 측에선 “야오밍이 중국리그에서 초인적인 활약을 펼쳤지만, 리그의 수준이 NBA보다 낮아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미국농구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 결국은 야오밍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하킴 올라주원의 시대를 재현할 제목으로 야오밍을 택한 휴스턴의 선택을 비관적으로 바라봤다. 美 현지 보도에 따르면 당시에만 무려 7명의 전문가가 야오밍의 성공가능성을 낮게 점쳤다는 후문.

또, 휴스턴의 주축이던 스티브 프랜시스도 야오밍의 지명을 비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야오밍과의 첫 훈련에서 그의 농구열정과 친화력에 깊은 감명을 받은 프랜시스는 이후 야오밍의 든든한 파트너가 됐고, 두 사람의 끈끈한 우정은 지금까지도 굳건하다. 그 예로 야오밍은 2004년 여름, 프랜시스가 올랜도 매직으로 트레이드 됐을 때, 구단 측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며, 친구 따라 올랜도 이적을 진지하게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명예의 전당 헌액 때도 프랜시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기도 했다. 마찬가지 프랜시스도 2016년 중국을 직접 방문, 야오밍의 명예의 전당 입성을 진심으로 축하하기도 했다.

찰스 바클리도 야오밍에 대한 혹평을 남겼지만 결국에는 개망신을 당한 케이스. 바클리는 “야오밍이 만약 데뷔시즌에 단 한 번이라도 19득점 이상을 올린다면 케니 스미스의 엉덩이에 키스를 하겠다” 엄포를 놓는 등 야오밍의 성공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시즌 개막 초만 해도 야오밍에 대한 바클리의 전망은 현실이 되는 듯했다. 야오밍은 데뷔전인 인디애나 페이서스전에서 무득점-2리바운드에 그치는 등 개막 후 첫 7경기에서 총 4득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그 결과, 휴스턴 팬들의 비난이 쏟아진 것은 물론, 개막전 이후 출전시간도 점차 줄어들면서 평균 14분 출전에 그쳤다.

그도 그럴 것이 야오밍은 2002 신인드래프트 직후, 곧장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가, 트레이닝캠프 합류가 늦어지면서 리그에 적응할 시간이 부족했다. 야오밍의 입장에선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는 등 오히려 부산 아시안게임 출전이 독이 됐다. 중국에선 우월한 신체조건을 앞세워 쉽게 농구를 했지만, 미국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신장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우위에 있었지만 운동능력이 좋고 파워가 좋은 NBA 선수들은 거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등 야오밍에게 쉽게 득점을 허락하지 않았다. 리그의 경기템포 차이도 야오밍이 리그 적응에 애를 먹었던 또 다른 이유.

그러나 야오밍의 부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야오밍은 본인의 데뷔 후 8번째 경기인 LA 레이커스전에서 23분 동안 무려 20득점(FG 100%) 6리바운드를 올리며 바클리의 예상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당시 레이커스는 샤킬 오닐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사마키 워커가 야오밍을 수비했다. 이에 경기종료 후 스미스는 스튜디오에 자신의 이름표를 단 당나귀 한 마리를 끌고 와선 바클리에게 “자신의 엉덩이에 키스를 할지 아님 당나귀 엉덩이 키스할지 스스로 결정해라” 선택권을 넘겼다. 결국, 바클리는 스미스가 아닌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를 했고, 이 장면이 전국방송을 타면서 바클리는 전국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레이커스전을 기점으로 야오밍은 리그에 적응하기 시작, 데뷔 시즌 82경기에서 평균 13.5득점(FG 49.8%) 8.2리바운드 1.8블록을 올리며 성공적으로 NBA 신고식을 마쳤다. 시즌 종료 후,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에 이어 신인왕 최종투표에서 전체 2위를 차지, NBA 올 루키 퍼스트 팀 한 자리도 야오밍의 것이었다. 또, 2003 올스타 투표부터 영어, 스페인어와 함께 중국어 기능이 도입, 야오밍은 대륙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으며 올스타전 선발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게 된다. 야오밍은 무려 25만여 표를 받으며 오닐을 제치고 서부 올스타 센터 부문 1위를 차지했다. NBA 역사상 데뷔 시즌 신인이 올스타전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1995년 그랜트 힐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야오밍은 리그 데뷔 후 총 8번 NBA 올스타에 선정됐다)

더불어 야오밍은 데뷔시즌 사람들의 편견과 함께 ‘인종차별’과도 싸워야했다. 실제로 야오밍이 2002년 12월 17일(이하 한국시간), 마이애미를 방문했을 당시, 히트의 팬들은 포춘 쿠키(fortune cookie) 8,000개를 나눠 먹으며 야오밍의 방문을 조롱했다. 美 현지에선 왜소한 동양인 여성의 체형을 비하할 때 포춘 쿠키 같다는 말을 사용한다고 한다. 마찬가지 오닐도 2003년 1월 17일, 야오밍과의 첫 만남을 앞두고, 동양인을 비하하는 단어인 칭총(Ching chong)을 언급하며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이후에도 리그의 수많은 구단들은 야오밍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이어갔고, 야오밍을 완전히 ‘리그의 이방인’으로 취급했다.

허나, 야오밍은 그때마다 흥분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이애미 팬들이 보여준 행동에 대해 “포춘 쿠키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는 말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오닐의 발언에 대해서도 “오닐이 그저 농담을 한 것일 뿐이다”라는 말로 냉정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실제 경기에서 야오밍의 분위기는 겉에서 보인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오닐을 상대로 4개의 블록슛과 경기 종료 10초를 남기고 덩크슛을 성공, 오닐의 인종차별적인 발언에 적극적으로 경기에 임하며 거칠게 오닐을 수비하는 등 내면에선 화가 많이 치민 모습이었다.(*후일 오닐은 은퇴 후 이날의 발언에 대해 공개적으로 야오밍에게 사과의 말을 남겼다)

이렇게 다사다난했던 신고식을 마친 야오밍은 2003-2004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팀의 중심으로 발돋움, 스탠 밴 건디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2003년 여름, 건강을 이유로 사임한 루디 톰자노비치 감독을 대신해 지휘봉을 잡은 밴 건디 감독은 야오밍을 중심으로 팀의 전술을 재편, 휴스턴은 2003-2004시즌 45승 37패, 서부 컨퍼런스 7번 시드로 PO 진출에 성공한다. 야오밍도 2시즌 연속 82경기 출장을 기록하는 등 정규리그를 17.5득점(FG 52.2%) 9리바운드 1.9블록으로 마쳤다. 다만, PO 1라운드, 야오밍과 휴스턴은 전당포 라인업의 레이커스에 4-1로 패하며 아쉬움 속에 시즌을 마쳐야했다.(*2002-2003시즌 휴스턴은 정규리그 43승 39패로 서부 컨퍼런스 9위를 기록했다)

[줌 인 NBA 스타] 만리장성 야오밍, NBA에 피어난 아시아의 자존심!

이에 휴스턴은 2004년 여름, 스티브 프랜시스-쿠티노 모블리-켈빈 케이토를 올랜도로 보내고 올랜도로부터 트레이시 맥그레이디-타이론 루-주안 하워드-리스 게인스를 영입, 맥그레이디와 야오밍, 투톱 체제로 팀을 재편했다. 당시의 맥그레이디는 ‘서코비 동티맥’으로 불리며 리그를 대표하는 득점기계로 주가를 올리고 있었고, 야오밍도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었기에 휴스턴은 2004-2005시즌, 강력한 서부 컨퍼런스 상위시드 후보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심지어 휴스턴을 서부 컨퍼런스 1번 시드로 지목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는 맥그레이디-야오밍 원투 펀치와 함께 디켐베 무톰보, 밥 수라 등 두 선수를 뒷받침하는 다른 선수들의 경쟁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시즌 초반 휴스턴은 맥그레이디가 잔부상으로 인한 경기력 하락과 함께, 야오밍과의 호흡에서 불협화음을 내며 시즌 전 기대했던 모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야오밍와 맥그레이디의 호흡이 점점 더 맞아 들어간 결과, 휴스턴은 51승 31패로 서부 5번 시드를 차지할 수 있었다. PO에서도 4번 시드인 댈러스를 상대로 첫 2경기를 먼저 따내는 등 상승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맥그레이디의 예기치 못한 무릎부상 등 악재들이 겹치면서 휴스턴은 또 다시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했다. 정규리그 80경기에서 평균 18.3득점(FG 55.2%) 8.4리바운드 2블록을 기록한 야오밍은 PO에서도 평균 21.4득점(FG 65.5%) 7.7리바운드 2.7블록으로 분전했지만 팀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이렇게 야오밍은 본인의 커리어 3번째 시즌까지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주며, 어느덧 리그를 대표하는 엘리트 센터로 성장했다. 13억의 인구를 앞세운 중국인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기는 했지만 해마다 야오밍은 올스타전 투표에서도 전체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만, 4번째 시즌인 2005-2006시즌, 왼쪽 엄지발가락 부상을 시작으로 부상악령에 시달리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했다. 2005-2006시즌도 평균 22.3득점(FG 51.9%) 10.2리바운드로 데뷔 후 처음으로 20-10을 기록했지만 정규리그 57경기 출장에 그치며 아쉬움을 남겼다. 마찬가지 맥그레이디까지 허리부상으로 고생, 야오밍과 맥그레이디, 두 사람이 함께 뛴 경기가 31경기에 그치는 등 2005-2006시즌의 휴스턴은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야오밍의 부상악령은 이후에도 계속 됐다. 2006-2007시즌, 시즌 초반 야오밍은 25경기에서 평균 26.8득점 9.7리바운드 2.3블록으로 강력한 정규리그 MVP후보로 주목받으며 부활의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2006년 12월, 오른쪽 무릎에 이상이 생기며 올스타전에도 결장하는 등 정규리그 48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어진 2007-2008시즌에도 왼쪽 다리부상으로, 정규리그 55경기 평균 22득점(FG 50.7%) 10.8리바운드 2블록을 기록하는 데 그치는 등 어느새 야오밍의 이름 앞에는 인저리 프론이란 오명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야오밍은 2008-2009시즌 정규리그 77경기에서 평균 19.7득점(FG 54.8%) 9.9리바운드 1.9블록을 올리며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더 이상 만리장성의 진격은 존재하지 않았다. 2009년 여름, 야오밍은 왼쪽 발 골절로 2009-2010시즌을 통째로 날려야했다. 당시, 담당의사는 야오밍과의 면담에서 “더 이상은 농구선수로 활동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후문. 그럼에도 야오밍은 재활의지를 불태우며 2010-2011시즌 재기를 노렸다. 휴스턴도 2010-2011시즌을 앞두고, 야오밍의 출전시간을 24분으로 제한할 것이라 언론에 공표하는 등 야오밍의 부상관리에 만전을 기했지만 2010년 12월, 야오밍은 왼쪽 다리에 철심을 박는 큰 수술을 받으며 끝내는 시즌을 접어야했다. 

결국, 더 이상은 농구를 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 야오밍은 2011년 7월 21일, 고향인 상하이에서 공식은퇴를 선언, 30살이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제2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줌 인 NBA 스타] 만리장성 야오밍, NBA에 피어난 아시아의 자존심!

야오밍의 은퇴소식에 수많은 중국 팬들이 온·오프라인에서 아쉬움을 드러낸 것은 물론, 데이비드 스턴, 前 NBA 총재도 “야오밍의 등장은 NBA의 인기를 아시아로 확장시켰다. 야오밍은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였고, 열정적인 선수였다. 무엇보다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가장 인간적인 선수가 바로 야오밍이었다”는 말을 전했다. 숙적이었던 오닐도 “야오밍은 매우 영민한 선수였다. 그는 인사이드는 물론, 아웃사이드에서도 플레이할 수 있다. 만약, 부상이슈만 없었다면 야오밍은 분명, NBA 역사상 역대 센터 포지션 5위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재능을 가진 선수였다”는 말로 야오밍의 은퇴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은퇴 후 야오밍은 앞서 언급했듯 2016년 9월, 샤킬 오닐, 앨런 아이버슨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또, 2017년 2월, 휴스턴은 야오밍의 백넘버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며 야오밍을 추억했다. 이어 야오밍은 현재, 만장일치로 중국농구협회의 회장직을 수행, 유소년농구의 활성화와 함께 2019년 중국에서 열릴 예정인 FIBA 농구월드컵 홍보대사까지 맡아 성공적인 대회 개최를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 중이다. 최근 일각에서 “2016 리우올림픽의 참사를 딛고, 동시에 대회의 흥행을 위해 야오밍이 직접 2019 농구월드컵 중국대표팀의 사령탑을 맡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중국 전역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줌 인 NBA 스타] 만리장성 야오밍, NBA에 피어난 아시아의 자존심!

또, 야오밍은 농구 외에도 교육과 와인사업, 부동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가로 변신, 중국경제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학 입학 7년 만에 상해 교통대를 졸업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또 한 번 화제를 낳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재치 있는 모습으로, 방송가에서도 섭외 0순위로 꼽히는 등 은퇴 후에도 야오밍은 여전히 많은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전 세계를 오가며 중국을 알리는 홍보대사로도 활약, 은퇴 후에도 여전히 뜨거운 애국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후문. 지난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 방문한 것도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홍보를 위해 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야오밍의 등장으로 NBA의 영향력은 아시아시장으로까지 확대, 그 결과, 아시아의 수많은 유망주들이 제2의 야오밍을 목표로 NBA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처럼 NBA 선수로서 야오밍의 커리어는 매우 짧았지만, 그 시간동안 인상적인 활약으로 NBA에 아시아의 자존심을 드높이는 등 야오밍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시아 최고의 농구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이와 함께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받은 사랑을 팬들에게 돌려주는 방법까지 잘 알고 있는 등 야오밍은 중국을 넘어 이제는 전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괴물(怪物)’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점프볼 DB, FIBA, 아디다스 코리아, NBA 제공

#자료참조-NBA.com, ESPN, BASKETBALL REFERENCE, Baidu.com



  2018-08-12   양준민([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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