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큰 웃음소리였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네트를 설치하는 모습이 마치 초등학교 체육시간 같다. 이화여대 특수교육과, 체육과학과 학생들이 합심했다. 20대 발달장애인과 배구를 배우며 또래 장애인들이 건전한 여가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돕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대학 내 통합 배구 동아리는 이들이 처음이다. 이제 갓 두 달 남짓 된 신생 동아리이지만 걸음마다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쏙쏙이화’를 만났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
2018 평창 패럴림픽을 거치며 대한민국의 장애인 체육은 한층 성장했다. 그러나 일상에서 장애인이 여가생활로 스포츠를 즐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 통계에 따르면 주 2회 이상 생활체육에 참여하는 비장애인은 48.2%이지만 장애인 생활체육 참여인구는 12.3%이다. 상대적으로 여가시간이 많은 장애인들이 건전하게 취미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운동 부족, 체력 저하, 비만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쏙쏙이화는 이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평소 특수체육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김주성(22) 씨가 여름 내내 기획해 9월부터 모임을 시작했다. 스페셜올림픽코리아(Special Olympic Korea)의 약자인 ‘SOK’를 활용해 이름을 지었다. 어느새 11명의 비장애인 대학생과 5명의 발달장애 청년이 합류했다. 체육과학과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김선민 코치(23)가 이들을 지도한다.
모두를 위한 스포츠
김선민 코치는 중학교까지 배구 선수로 뛰었다. 엘리트 선수 출신 지도자가 이제 막 배구를 시작한 초보를 가르치는 게 힘들지는 않을까. 김 코치는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하진 않다”며 대화를 이어갔다.
“쏙쏙이화는 스포츠를 바라보는 방식이 기존과 완전히 달라요. 일반적인 스포츠가 경쟁, 승리에 초점을 둔다면 우리팀은 모두가 공을 만져보고 운동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입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한다’는 게 저희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말 같아요. 성적에 집착할수록 선수들 사이에 서열이 생기잖아요. 잘하는 선수 위주로 팀이 굴러가게 되고요. 여기서는 다함께 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잘하는 사람 위주로 전략을 짜는 게 아니라 이 선수가 어떻게 하면 한 번 더 공을 받아볼 수 있을까에 중점을 두게 됩니다.”
김 코치에게도 장애를 가진 가족이 있다. 그는 조금이나마 가족에 도움이 되고자 이 길을 선택했다. 체육과학부에 입학해 사회복지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장애인복지는 입지가 좁아요. 이왕 시작한 길, 제 손으로 장애인 복지에 대해 더 많은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점 하나가 원이 되기까지연습 시작 전 쏙쏙이화의 지도교수가 체육관을 방문했다. 이화여대 특수교육과 교수이자 이대부중 교장을 맡고 있는 박은혜(53) 교수였다. 퇴근 시간을 한참 넘기고도 이들의 모임을 참관하기 위해 기다렸다는 박 교수는 제자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학생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특수교육과 전공수업에 ‘장애학생 예체능교육’이란 과목이 있습니다. 한 과목 내에서 음악, 미술, 체육을 다 가르쳐야 하죠. 운동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들에 대한 기본적인 체육 교육 방법을 배웁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소리가 나는 공을 사용하는 배구, 또는 지체장애인을 위한 좌식배구 같은 것들이요.”
박 교수는 “특수교육 전공 학생들이 특정 스포츠 종목을 직접 해볼 기회는 없고,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운동할 수 있는 시간도 부족하다”면서 “장애인들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게 아니라 같이 배구를 배우는 일이다. 이런 활동이 분명 학생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지체장애, 뇌성마비 교육이 전공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장애인 대부분은 운동을 못하지만 정말 하고 싶어한다. 장애인들에게도 몸을 쓰는 일은 아주 중요한데 다만 그럴 기회가 없다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몸의 발달을 위해 좋고요. 성인이 된 후에는 체력 증진, 사회성 발달에도 도움이 되잖아요. 또 여가시간을 건전하게 활용할 수 있죠.”
박 교수는 그만큼 쏙쏙이화 활동이 학생들에게도 좋은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사회에 필요한 모임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특수교육 분야가 그렇습니다. 점 하나 찍은 게 원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린 황무지에서 점을 찍고 다녀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어요. 새로운 길을 가는 제자들을 응원합니다.”
맨땅에 헤딩
쏙쏙이화는 10월 초 열린 스페셜올림픽 통합배구대회에 참가했다. 장애인 선수와 비장애인 파트너 선수가 함께 출전하는 대회였다. 참가한 다섯 팀 중 5위를 기록하긴 했지만 이들에겐 순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모임 내내 이들은 지난 주말 참가했던 대회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끊임없이 웃었다. 한 시간의 운동이 끝난 후에는 아예 둥글게 모여앉아 30분 동안 서로 생활을 나눴다. 수다는 멈추지 않았고 입가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최원재(23) 씨가 신이나서 설명했다. “대회 나갔을 때 진짜 웃겼어. 유니폼이 필요 없는 줄 알고 검은 반바지에 흰 티셔츠만 맞춰 입고 갔는데 우리 빼고 다들 너무 멋지게 입고 온 거야. 심판이 우리한테 등번호도 없냐고 물어봤어. 그래서 티셔츠에 매직으로 이름 적고 경기했지. 다른 팀에서 배구공이랑 보호대도 빌려주더라.”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대학생들의 모임이니만큼 팀 사정은 열악하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다. 김주성 회장은 쏙쏙이화를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에 비유했다. “우리 꼭 자메이카 봅슬레이팀 같지 않아?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에서 동계스포츠를 하듯이 말이야. 우리가 없는 살림에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나봐. 스페셜올림픽코리아 협회에서도 우리를 주제로 짧은 영상을 만들겠다고 했어.”
동아리 초창기에는 회장인 김주성 씨가 사비를 털어 체육관을 빌렸다. “처음엔 걱정도 많았는데 회원들이 회비를 모아주고 학교에서도 지원금을 받아서 다행히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요. 그래도 빠듯하다보니 강원도 인제에 대회를 나가는데 버스를 못 빌리고 시외버스를 타고 이동했어요. 다른 팀들이 편하게 대절 버스를 타고 다니는 걸 보니 회원들한테 미안했죠.”
코치를 제외하고는 배구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훈련의 전문성도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대회에 참가했던 팀 중 비장애인 파트너 선수가 엘리트 출신이 아닌 곳은 쏙쏙이화 뿐이었다. 김선민 코치가 곧 졸업을 앞두고 있기에 지도자를 구하는 일 또한 시급하다.
“모임 초창기이고 다 같이 배우는 입장이니 괜찮다 싶다가도, 코치님이 졸업한 이후를 생각하면 막막해요. 혹시 잡지를 보시고 저희에게 관심이 생기셨다면 꼭 연락주세요, 미래의 코치님! 배구를 함께 하고 싶은 20대 발달장애인분들도 연락 주시고요!”
너무나도 당연한 것
쏙쏙이화 회장인 주성 씨는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15학번으로 이화여대 체육과학부에 입학했다가 다시 수능을 보고 같은 대학 특수교육과에 16학번으로 입학했다. 지금은 체육 교직을 복수전공하며 특수교사 겸 체육교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평범한 대학생처럼 진로에 대한 고민은 많지만 그의 꿈은 뚜렷하다. 좋아하는 것을 살려 일하는 것.
특수체육 분야에서 연구와 활동을 하고 싶다는 주성 씨 눈에서 빛이 났다. “전공수업에서 체육 활동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친구들이 굉장히 즐거워했어요. 사실 일반 대학생들이 운동량이 부족하잖아요. 우리도 체력을 키우면서 장애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운동 동아리라면 자고로 대회에 나가야 성취감을 키울 수 있으니 스페셜올림픽을 목표로 삼았죠.”
그에게선 긍정 에너지가 넘쳤다. “처음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일까봐 걱정해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안했어요. 지인 중에 특수체육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섭외했죠. 이화인 12명에 발달장애인 5명이 모였어요. 저희도 처음이니까 발달장애인 분들 중에서도 증상이 경한 분들을 찾았어요. 지시를 잘 따르고 특별한 돌발 행동이 없는 분들로요. 모집이 쉽지 않았는데 지도교수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주성 씨는 <더스파이크> 독자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런 모임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같은 교육을 받는 건 당연하잖아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통합 생활체육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죠. 저희가 특별한 일을 한다거나 좋은 일을 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다른 동아리랑 똑같이 팀원을 모아서 운동을 하는 것이니 저희를 너무 멋지게 혹은 특별하게 생각 안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대학 동아리로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모임이 처음이기 때문에 저희를 신기하게 보실 수 있겠지만요. 이런 모임이 많아져서 ‘그런 팀 많잖아?’ 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임의 막내인 진하영(20) 씨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발달장애인이라고 해서 다르게 생각할 것은 전혀 없어요. 똑같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돌발행동을 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하는 정도죠. 만약 돌발행동을 하더라도 진정시키면 되고요. 장애, 비장애를 구분하는 것도 불필요한 것 같아요. 그냥 친구와 같이 취미생활로 운동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배구는 하이큐로 배웠다아마추어 취재 현장에 가면 배구만화 ‘하이큐’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자폐 범주성 장애를 앓고 있는 최원재(23) 씨는 아예 하이큐 저지를 입고 체육관에 나타났다. “배구는 ‘하이큐’로 배웠어요. 극중에 등장하는 아오바죠사이 오이카와 선수를 좋아해 그가 입는 유니폼을 샀죠. 아직은 배구를 시작한지 얼마 안됐지만 기회가 된다면 오이카와처럼 세터로 뛰고 싶어요.”
그는 서울 경계인 청년센터에서 운영하는 아자라마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한다. 일이 없는 날 원재 씨는 모든 시간을 ‘하이큐’에 쏟아 붓는다. “쏙쏙이화가 이번 대회에 출전했는데 우리 팀 환경이 너무 열악했어요. 만화 같은 상황이기도 했죠. 그래도 저희는 대회 체질인 것 같아요. 전패했지만 짧게 연습한 것 치고 경기 내용이 좋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배구를 직접 해볼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쏙쏙이화가 추구하는 건 이기기 위한 스포츠가 아니다. 서로가 함께하기 위한, 모두의 성장을 위한 배구. 배구를 매개로 장애 여부를 떠나 또래 친구들이 어울리는 공간이 생겨났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쏙쏙이화. 이들이 찍은 작은 점 하나가 앞으로 얼마나 큰 원을 만들어갈지 <더스파이크>도 궁금해진다.
특수교육이란?특수한 교육 욕구를 지닌 장애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말한다. 법률에 의해 교육청에서 선정하는 ‘특수교육 대상자’에 포함이 되면 특수교육의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시청각장애, 지체장애 뿐 아니라 발달장애, 자폐 범주성 장애 등 특수교육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 이 특수교육 대상자를 가르칠 교사를 육성하는 곳이 사범대학의 특수교육과다. 패럴림픽, 스페셜올림픽, 데플림픽세 대회 모두 장애인 선수가 출전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대회 마다 선수들의 장애 유형이 다르다. 패럴림픽(Paralympic)은 척수장애인을 위한 경기로 시작되었다. 때문에 하반신 마비를 뜻하는 ‘paraplegia’를 바탕으로 이름 지어졌다. 현재는 하반신 마비 뿐 아니라 다른 신체적 장애가 있는 선수들도 출전한다. 스페셜올림픽(Special Olympic)은 지적장애, 자폐범주성 장애 등 발달장애인을 위한 대회이다. 데플림픽(Deaflympic)에는 청각장애가 있는 선수들이 참가한다.
글/ 권소담 기자
사진/ 박상혁 기자
(위 기사는 더스파이크 11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2018-11-25 서영욱([email protected])저작권자 ⓒ 더스파이크.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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