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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보스턴 셀틱스, 식스맨의 정의를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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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화) 10:22

                           



[점프볼=최연길(MBC 스포츠 플러스 해설위원)]NBA 역대 최장기간 왕조였던 보스턴 셀틱스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무려 16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그 원동력에는 빌 러셀, 밥 쿠지 같은 전설적인 선수와 명장 레드 아워백도 있었지만 현대 농구에서 중요한 부분인 식스맨도 빼놓을 수 없었다. 보스턴은 미국농구 역사상 식스맨의 개념을 가장 먼저 도입한 구단이었다. 그런 만큼, 그 어느 구단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탄탄한 계보를 자랑한다.





프랭크 램지, 샘 존스, K.C. 존스, 클라이드 러블릿, 존 하블리첵, 돈 넬슨, 케빈 맥케일, 빌 월튼…. 모두 미국농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전설적인 인물들이다. 또한 이들에게는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모두 보스턴 셀틱스의 일원이었고 두 번째는 보스턴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세 번째는 모두 식스맨 출신이라는 점이다.





 









초창기 벤치 플레이어들의 역할 





식스맨(Sixth Man)이란 말 그대로 ‘여섯 번째 사람’이라는 뜻이다. 농구가 5대5 경기가 된 이후 식스맨은 주전(스타팅) 선수들을 제외하고 벤치에서 나오는 선수 중 가장 뛰어난 선수를 지칭해왔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식스맨들이 잘 해줘야 한다’, ‘식스맨들 활약이 좋았다’라는 표현은 엄밀히 말하면 맞지 않는다. 식스맨은 여러 명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벤치 선수 한 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의 최고 벤치 선수가 누군지 명확하지 않을 경우에는 상기 표현들이 틀렸다고만은 할 수도 없다.





1891년 제임스 네이스미스 박사에 의해 농구가 탄생한 이후 벤치 멤버들은 늘 존재해왔다. 하지만 식스맨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부각된 것은 NBA가 탄생한 이후였다. 농구가 5대5 경기가 된 이후 주전들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1946년 NBA의 전신인 BAA가 기존 경기 시간보다 8분 더 긴 48분으로 경기 시간을 정하면서 벤치 전력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물론, 초창기 NBA에서 벤치 선수들의 역할은 한정되었다. 단순히 주전들에게 쉬는 시간을 보장해주거나, 주전들이 파울트러블에 걸렸을 때 시간을 메워주는 역할 정도였다. 또한 경기가 잘 안 풀릴 때 투입되어 상대의 스타플레이어를 거칠게 몰아붙여 도발하고, 싸움을 일으키는 역할도 맡았다. 1950년대까지 NBA 선수들 중에는 경기 중에 싸우다 이가 빠진 선수들도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NBA가 아이스하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NHL은 경기 중 선수간 싸움이 암묵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초창기 NBA 구단들의 다수가 아이스하키 구단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는 부분이다.





물론 우리 팀 스타에게 상대가 거친 플레이를 할 때 그에 대한 방어와 대응을 하는 것도 벤치 선수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NBA에서는 그런 선수들을 흔히 ‘경찰관(policeman)’ 혹은 ‘보디가드(bodyguard)’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선수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이후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의 알 애틀스다. 183cm, 79kg의 작은 체구의 포인트가드였던 애틀스는 노스캐롤라이나 A&T 대학을 졸업하고 NBA 드래프트 5라운드 39번으로 필라델피아에 입단했다.





 





당시 필라델피아에는 가이 로저스는 걸출한 포인트가드가 있었고 애틀스는 로저스의 백업으로 활약했다. 또한 필라델피아는 당시 최고 선수였던 윌트 채임벌린이 있었다. 상대팀들은 채임벌린을 막기 위해 거친 수비를 불사했다. 하지만 채임벌린은 자신이 싸우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싸움을 피하는 편이었다. 이때 채임벌린이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막고 대신 싸워준 보디가드가 바로 애틀스였다. 애틀스는 1960년부터 1971년까지 11시즌을 뛰며 8.9득점, 3.5어시스트를 기록했고 등번호 16번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구단에 의해 영구결번 되었다. 또한 애틀스는 1975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우승으로 견인한 성공한 감독이기도 했다.





 





보스턴의 초창기 벤치 선수들





현대적인 식스맨의 개념이 생긴 보스턴 셀틱스에도 초창기에는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벤치 선수가 있었다. 1950년, 보스턴에는 중요한 두 명의 인물이 가세한다. 한 명은 NBA 역대 최고 명장 중 하나로 꼽히는 레드 아워백이고, 다른 한 명은 전설적인 포인트가드 밥 쿠지였다. 당시 보스턴은 쿠지의 팀이었다. 따라서 상대팀에게 쿠지는 대단히 성가신 존재였고 경기가 안 풀릴 때면 고의적으로 쿠지에게 거친 플레이를 하곤 했다. 아워백 감독은 이런 쿠지를 보호하는 경찰관 역할의 선수가 필요했다. 1951년, 아워백은 밥 브래넘에게 쿠지를 보호하는 경찰관의 임무를 맡겼다.





 





 브래넘은 196cm, 97kg의 파워포워드로 별명이 ‘탱크(the Tank)’일 정도로 단단하고 거친 선수였다. 켄터키 대학을 다니다 2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미시건 주립대학으로 학교를 옮긴 브래넘은 1949-1950시즌 NBA의 시보이건 레드 스킨스에 입단해 59경기에 출장해 12.1득점, 3.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시보이건이 NBA에서 쫓겨나 NPBL(National Professional Basketball League)로 강등되면서 브래넘도 잠시 NBA를 떠나야 했다.





1950년 아워백이 보스턴을 지휘봉을 잡은 후 브래넘은 보스턴 트레이닝 캠프에 초청을 받았다. 브래넘은 거친 플레이를 펼쳤지만, 오히려 아워백은 브래넘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후 브래넘은 4시즌을 보스턴에서 뛰며 경기당 23.6분을 뛰며 7.3득점, 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브래넘이 떠난 이후 경찰관의 역할은 짐 로스커토프의 몫이었다. 196cm, 99kg의 좋은 체격조건을 지닌 로스커토프는 별명이 ‘정글 짐(Jungle Jim)’일 만큼 거친 수비수였다. 오레곤 대학을 졸업하고 1955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로 보스턴에 뽑힌 로스커토프는 브래넘의 임무를 넘겨받았고 수비와 리바운드 등 궂은일을 도맡아했다.





아워백은 “로스커토프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리바운드였고 다른 하나는 쿠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었죠”라며 로스커토프의 역할을 설명했다.





1956년 로스커토프는 빌 러셀과 탐 하인슨이라는 좋은 빅맨들이 가세하자 백업으로 활약하며 7차례 우승을 함께 했다. 로스커토프는 1955년부터 1964년까지 보스턴에서 9시즌을 뛰며 6.2득점, 5.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보스턴 구단은 로스커토프의 등번호 18번을 영구결번하려 했지만 로스커토프는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거절했다.





 





식스맨의 시작, 프랭크 램지





아워백은 서서히 보스턴 왕조를 위한 퍼즐조각을 맞춰나갔다. 당대 최고의 백코트였던 밥 쿠지와 빌 샤먼에, 뛰어난 수비수이자 리바운더였던 로스커토프 그리고 득점력이 좋은 프랭크 램지와 훌륭한 인사이더였던 탐 하인슨 그리고 보스턴 왕조의 마지막 퍼즐조각이라 여겨지는 빌 러셀을 영입하며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셀틱 왕조’를 건설했다.





아워백은 쿠지, 샤먼, 러셀을 앞세운 빠른 공격농구를 구사했다. 아워백은 풀코트 프레스를 쓰며 템포를 올렸고, 러셀의 수비 리바운드와 블록슛을 속공으로 연결하는 화려한 농구를 선보였다. 당연히 빠른 템포의 농구에는 체력 소모가 심했고 주전들이 쉴 동안 공격을 이끌 벤치 선수도 필요했다.





이때 아워백이 낙점한 선수가 바로 프랭크 램지였다. 1953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로 보스턴에 뽑힌 램지는 191cm, 86kg의 스윙맨이었다. 램지는 명문 켄터키 대학에서 명장 아돌프 럽 감독 밑에서 뛰었다. 1951년에는 2학년 신분으로 NCAA 토너먼트 우승도 맛봤다.





램지는 드래프트 순위(1953년 3순위)와 득점력을 감안하면 당연히 주전감이었다. 하지만 당시 보스턴에는 너무나도 걸출한 선배들이 많았다. 1954-1955시즌, 11.2득점, 6.3리바운드를 기록한 램지는 1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주전 자리는 없었다. 그러자 아워백은 램지에게 식스맨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물론 당시에는 식스맨이라는 용어조차도 없었다. 램지는 “저는 긴장을 풀기 위해 많은 슛을 던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10개에서 15개면 충분했죠. 반면 탐 하인슨같은 친구는 30분 이상 몸을 풀어야 했습니다. 저는 레드(아워백)가 제 이름을 부르자마자 웜업 재킷을 벗고 본부석으로 달려갔어요. 레드는 제게 ‘열리면 던져라, 그게 네가 우리 팀에 있는 이유다’라고 말했습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램지는 1964년까지 9시즌을 보스턴에서만 뛰며 경기당 24.6분을 출전해 13.4득점, 5.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보스턴은 그와 함께 7번 NBA 정상을 밟았다. ‘원조 식스맨’이라는 공로를 인정받아 1982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고, 2006년에는 대학농구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했다.





 









역대 최강 식스맨, 존 하블리첵





보스턴은 이후 1969년 러셀이 은퇴할 때까지 13시즌 동안 11번의 우승을 차지했고 러셀 은퇴 이후에도 1974년과 1976년 두 차례 더 우승했다. 1980년대에도 보스턴은 래리 버드를 앞세워 1981년, 1984년, 1985년 우승을 차지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선수들이 바뀌었고 보스턴이 자랑하는 식스맨 계보도 이어지며 우승을 도왔다. 샘 존스, K.C. 존스, 탐 ‘샛치(Satch)’ 샌더스, 클라이드 러블릿 등이 벤치에서 나와 맹활약을 펼쳤다.





그 중 팬들로부터 최고의 식스맨으로 꼽히는 인물은 바로 존 하블레첵이다. 오하이오 주립 대학 출신 196cm, 92kg의 스윙맨이던 하블리첵은 대학 시절만 해도 걸출한 동료들에 밀려 큰 관심을 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명장 프레드 테일러가 이끌던 오하이오 주립대학은 1960년 NCAA 토너먼트 우승팀이었다. 당시 하블리첵은 2학년으로 경기당 12.2득점, 7.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같은 팀에는 제리 루카스, 래리 시그프리드, 멜 노월, 밥 나이트 등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루카스는 1964년 NBA 신인상을 수상하고 두 시즌 연속 평균 20-20을 기록했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한 선수였다. 1973년에는 NBA 챔피언(뉴욕 닉스)에도 올랐다. 





물론 하블리첵도 이들에 밀릴 것은 없었다. 4학년이던 1961-1962시즌에는 17득점, 9.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루카스에 이어 팀내 득점, 리바운드 2위를 기록했다. 1962년 NBA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7순위로 보스턴에 지명된 하블리첵은 같은 해 NFL 드래프트 7라운드 95번으로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NFL에서는 개막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는데 실패했고, 결국 그는 농구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하블리첵의 데뷔 당시 보스턴은 이미 왕조를 구축하고 있었고 전설적인 선수들도 많았다. 하블리첵은 샘 존스, K.C. 존스같은 선배들처럼 처음 7시즌 동안은 식스맨으로 활약했다. 이에 대해 하블리첵은 “한 번도 신경 쓰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식스맨이 우리 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워백 감독에게서 ‘식스맨은 경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대개 저는 경기 막판에는 뛰었죠”라고 말했다.





하블리첵이 경기를 끝내는 선수라는 것을 증명한 좋은 예는 1965년 동부 지구 결승 7차전이었다. 하블리첵은 윌트 채엄빌린과 할 그리어가 버티는 필라델피아 76ers와 경기 막판 승부를 결정짓는 스틸을 기록했다. 이 장면은 당시 보스턴의 구단 아나운서였던 조니 모스트의 “하블리첵이 공을 가로챘습니다. 끝났습니다!”라는 강렬한 외침과 함께 구단을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역사에 남았다.





하블리첵은 와이드 리시버 출신답게 넘치는 에너지로 경기 내내 코트 전역을 누볐다. 그러한 에너지 넘치는 플레이 덕에 하블리첵은 ‘혼도(Hondo : 존 웨인 주연의 서부 영화 제목)’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하블리첵은 보스턴에서 8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그 중 1974년과 1976년 우승은 빌 러셀 없이 새로운 파트너 데이브 코웬스와 이뤄냈다. 하블리첵은 NBA에서의 16시즌 동안 오로지 보스턴에서만 뛰며 통산 20.8득점, 6.3리바운드, 4.8어시스트, 1.2스틸을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통산 26,395득점은 여전히 보스턴 구단 최다 득점기록으로 남아있다. 하블리첵은 또 13년(1966~1978) 연속 NBA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올 NBA 퍼스트팀 4회, 세컨드 팀 7회, 올 디펜시브 퍼스트팀 5회, 세컨드 팀 3회에 올랐고 NBA 50주년 위대한 50인의 선수에도 이름을 올렸다.





 





 





BONUS ONE SHOT | 이후로도 계속된 보스턴 식스맨의 계보





하블리첵 이후에도 보스턴은 걸출한 식스맨들을 계속 배출했다. 1969년 LA 레이커스와의 7차전에서 마지막 결승골을 넣은 돈 넬슨도 그 중 하나다. 넬슨은 이후 감독으로 맹활약하며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또한 1984년 LA 레이커스와의 결승 2차전에서 결정적인 가로채기에 이은 레이업을 성공해 경기를 연장으로 몰고 갔던 제럴드 헨더슨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보스턴의 식스맨 계보를 말하자면 1984년과 1985년 최초로 NBA 식스맨상을 2년 연속 수상한 케빈 맥케일과 1986년 수상자인 빌 월튼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본 기사는 점프볼 4월호에 게재된 것으로, 최연길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의 기고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2018-05-01   최연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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