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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1가입

한폴낙 한폴낙 신나는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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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8 (월) 16:04

                           

23일 아침 당머리를 떠나 논잠포로 가려고 했다.

아버지가 혹시 논잠포에 계시는가 생각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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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안개가 자욱한 속에 문득 배 한 척이 돌연히 날아오자 

뱃사람들이 왜선이 온다고 외치므로 나는 사로잡힘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서, 옷을 벗고 물 속에 뛰어버리자, 

집안 처자 형제와 한 배의 남녀가 거의 반 이상이 함께 물에 빠졌다. 

그런데 배 매는 언덕이어서 물이 얕아, 적이 장대로 끌어내어 일제히 포박하여 세워 놓았다. 

 

오직 김주천 형제와 노비 10여 명이 언덕에 올라 달아나서 모면되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형님의 위패는 둘째 형이 안고 물 속에 떨어졌는데, 끌어내는 사이에 수습하지 못하였으니, 

돌아가신 모친과 살아계신 부친을 섬겨보려던 뜻이 한꺼번에 다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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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 용이와 첩의 딸 애생을 모래 밭에 버려 두었는데, 조수가 밀려 떠내려가느라 우는 소리가 귀에 들리더니 한참만에야 끊어졌다. 

나는 나이가 30세에 비로소 이 아이를 얻었는데, 태몽에 새끼 용이 물 위에 뜬 것을 보았으므로 드디어 이름을 용이라 지었던 것이다. 

누가 그 아이가 물에 빠져 죽으리라 생각했겠는가? 

 

부생(浮生)의 온갖 일이 미리 정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다. 

왜적이 내가 타고 가던 배를 저희들 배의 꼬리에 달고 바람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는데 배가 살과 같이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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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무안현의 한 해곡에 당도하니,

적의 배 수천 척이 항구에 가득 차서 붉은 기ㆍ흰 기가 햇볕 아래 비치고, 반수 이상이 우리나라 남녀로 서로 뒤섞여 있고, 

 

양옆에는 어지러이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울음 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바다 조수도 역시 흐느꼈다. 

무슨 마음으로 낳았으며, 무슨 죄로 죽는 것인가? 

나는 평생에 사람 중에서 가장 나약하고 겁이 많은데도, 이때만은 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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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물 따라 그대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왜적 하나가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 묻기를,

“너희 수로대장(水路大將 이순신 장군)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태안 안행량에 있는데, 배들이 해마다 표류되고 난파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좋게 지은것인데, 대개 수로의 천험(天險)이 된다. 

그러므로 명나라 장수인 소(召)ㆍ고(顧) 두 유격(遊擊)이 수만 척을 거느리고 내려오는데, 

이미 군산포에 와 있고, 통제사(이순신)는 수가 모자라서 물러섰지만,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서는 이리 저리 서로 쳐다보더니 개중에는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리는 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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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만히 통역에게, 나를 잡아가는 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예주수(伊豫州守) 좌도(佐渡)의 부곡(部曲) 신칠랑(信七郞)이라는 자라고 했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예하 부대인 오즈 성주 사도(佐渡)의 부하 노부시치로(信七郞)

 

밤에 장인께서 몰래 결박을 풀어 주시기에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 들어가자, 적의 무리는 떼를 지어 소리를 치며 즉시 끌어내었다. 

이 때문에 나의 집안 식구를 더욱 단단히 얽어매서 동아줄이 살 속을 파고 들어가서 손등이 모두 갈라지고 터져서 끝내 큰 종기가 되었다. 

그래서 3년을 지나도록 굽히고 펴지를 못했으며 오른손에는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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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에게 묻기를,

“적이 어째서 우리들을 죽이지 아니하느냐?”

하니, 통역이 대답하기를,

“공 등이 사립(絲笠)을 쓰고 명주 옷을 입었으므로 관인(官人)이라고 생각하여 포박하여 

일본에 송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삼엄하게 경계하고 지키는 것이다.”

하였다.

 

 

3일이 지나자 왜적은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 묻기를,

"누가 바로 정처(正妻)이냐?“

하니, 부인들이 다 자수하자 왜선으로 몰아 올라가게 하고, 나의 형제를 옮겨서 실으면서 말하기를,

“장차 너희들을 죽일 것이다.”

하였다. 나의 첩ㆍ처조부 및 큰형수ㆍ비자(婢子) 10명과 처부의 서제매 등을 혹은 나누어 싣기도 하고 정말 살해하기도 했다. 

 

슬프도다! 맏형이 돌아가실 적에 말문이 어둔하여 종이를 빌려 기록하신 말이 있다.

“네가 있으니 나는 잊고 간다. 형수를 부탁한다.”

하였는데, 누가 갑자기 이 지경을 당할 줄이야 생각했겠는가?

삶과 죽음을 생각하니 비통하기 그지없지만, 나 역시 목숨이 어느 때까지 붙어 있을지 알 수 없는 처지였다. 

노비들도 나를 버리고 달아난 자는 모두 목숨을 도생했고, 상전을 연연하여 차마 가지 못한 자는 모두 살해를 당했으니, 

이 역시 슬픈 일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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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에 나오는 순천왜성 그림 )

 

이윽고 여러 왜가 많은 배를 발동하여 남으로 내려갔는데, 

영산창 우수영을 지나서 순천 왜교에 당도했다. 

이곳에는 판축(板築)이 이미 갖추어 해안에다 성을 쌓아 위로 은하수에까지 맞닿을 정도였다. 

배들은 모두 줄지어 정박해 있었는데, 유독 부인(俘人 사로잡힌 사람)들이 탄 배 백여 척만은 모두 바다 가운데 떠 있었다. 

대개 포로되어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 9일 동안에 물 한 모금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죽지 아니하니 진실로 목숨이 모진 모양이다. 

뒤에 오는 남녀는 태반이 친구집 가족들이었는데, 양우상 집안이 참몰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날 왜녀가 밥 한 사발씩을 사람들에게 각기 나누어 주었는데, 

쌀은 뉘도 제대로 벗기지 아니했고 모래가 반을 차지했고, 생선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뱃사람들은 배가 하도 고파서 깨끗이 씻어 말려서 요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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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옆 배에서 여자가 울다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옥을 쪼개는 듯하였다. 

나는 온 집안이 참몰당한 뒤부터 두 눈이 말라 붙었는데, 이날 밤에는 옷소매가 다 젖었다. 

따라서 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어디서 들려오는 죽지사(竹枝詞) 노래 / 何處竹枝詞

밤조차 삼경인데 달도 하얗도다 / 三更月白時

이웃 배가 모두 눈물짓는데 / 隣船皆下淚

가장 젖은 건 초신의 옷이로다 / 最濕楚臣衣

 

이튿날에 한 척의 적의 배가 옆을 스쳐가는데 어떤 여자가 급히 ‘영광 사람! 영광 사람! 영광 사람 없소?’ 하고 부르므로, 

둘째 형수씨가 나가 물으니, 바로 애생의 어미였다. 서로 갈린 후로 소식을 몰라 벌써 죽었거니 생각했는데,

아직 안 죽고 살았다니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굶어 죽고야 말았다.

 

그이가 천만 가지로 슬피 하소연하는 것을 귀로는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이날 밤부터 밤마다 통곡을 했다. 왜노가 아무리 때려도 그치지 않더니 밥을 먹지 아니하고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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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형의 아들 가련이는 나이가 여덟 살인데 얼마나 목이 말랐던지 갯물을 들이켰는데, 

그 길로 병을 얻어 토하고 설사하고 야단법석이었다. 병이 나자 적이 물 속에 던지니,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오래도록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아이야 아비를 바라지 말라(兒兮莫望父)’라는 옛말이 참말이 되었다.

 

그후 수일이 지나서 장인과 두 형이 작은 배 한 척을 몰래 타고 가려고 하였는데 

적이 알고서 곧 좌도(佐渡)에게 달려가 알렸다. 그래서 그 날 저녁 큰 배 하나에다 우리집 식구를 실었는데, 

거기에는 다른 배에서 옮겨 온 선비의 자녀들이 많았다. 아마 9명쯤 되었는데

서로들 옛 이야기를 하고서 한 바탕 슬피 울었다. 처제 우영이의 나이가 13세요 얼굴이 어여쁜 계집애다. 

생사를 모르던 아이였었다. 이날 우리 배로 옮겨 탔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하고는 나를 보더니 대뜸 흐느껴 울었다. 따라온 더부살이들도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모조리 놈들의 손아귀에 걸려 죽어 없어졌다는 것이다.

배가 닻줄을 풀고 떠났는데, 날은 벌써 석양이었다. 안골포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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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1748 )에 나오는 조선통신사가 그린 대마도 )

 

이튿날 안골포를 출발하여 남으로 잠깐 갔다가 동으로 잠깐 갔다가 하여 한 바다를 횡단하였는데,

갑자기 닭 소리가 들리고 첫새벽 안개 속에 대륙이 가로 뻗어 있는 것이 바라보였는데, 곧 대마도였다.

인가(人家)의 제도가 다르고, 의관(衣冠)도 다 괴이하게 만들어져서 처음에는 딴 세계로 알았었다. 

남아가 날 적에는 진실로 뽕나무 활에 쑥대 화살로써 천지 사방을 쏘는 것이지만 그러나 몸소 왜국에 오리라는 것을 누가 생각했겠는가. 

비바람 때문에 이틀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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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1748 )에 나오는 조선통신사가 그린 이키 섬 )

이튿날 또 하나의 큰 바다를 건너 한 육지에 당도했는데, 곧 일기도(壹岐島 이키 섬)였다. 큼직한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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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또 바다 하나를 건너니 긴 산 둘레 안에 목이 하나 있는데, 오밀조밀한 저잣거리가 보였다. 장문주(長門州)의 하관(下關)이었다. 

이튿날에 또 바다 하나를 건너 언덕을 타고 내려간즉 또 하나의 큰 저잣거리가 나타났다. 주방주(周防州) 의 상관(上關)이었다. 

바다와 산이 그림과 같고 감귤이 아름답게 빛났는데, 귀신의 소굴이 된 것이 애석하다. 

 

문주 : 일본의 야마구치현(山口縣) 동북부에서 서반부(西半部)를 일컫던 옛 지명.

 

주방주 : 일본의 야마구치현(山口縣) 동쪽 지역을 일컫던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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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에 또 한 바다를 건너서 이예주(伊豫州 )의 장기(長崎 나가사키)에 정박한 후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는데, 

굶주림과 피곤함이 너무 심하여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졌다. 

작은 딸이 나이가 여섯 살이어서 제 힘으로 걷지 못하므로 아내와 처모(妻母)가 번갈아서 업었다.

업고서 개울 하나를 건너다가 거꾸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스스로 일어설 기운이 없는 겐지 쓰러진 그대로 그만 누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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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있던 한 왜인이 눈물을 흘리며 붙잡아 일으키고 말하기를,

 

“아! 너무도 심하다. 대합(大閤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이 사람들을 사로잡아다가 어디다 쓰려는가? 어찌 천도(天道)가 없을소냐?”

 

하고, 급히 자기 집으로 달려가서 서속밥과 차숭늉을 가지고 와서 우리 한 집 식구를 먹였다. 

그제서야 귀와 눈이 들리고 보였으니, 왜노 가운데도 이와 같이 착한 사람이 있었다. 

왜놈들이라고 해서 죽기를 좋아하고 살기를 싫어할 리가 없다.

흉측한 짓을 하는것은 법령을 마련하여 사람들을 그런 틀에 짜 넣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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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26년 무술(戊戌 1598)의 해도 이미 새해(1599)로 바뀌었다. 

폭죽을 올려 귀신을 쫓고 연등을 밝혀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은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와 비슷하지만,

사람 낯짝이지만 짐승 같은 짓들인 것만이 다르다 할까

 

좋은 때와 성대한 명절일수록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게 하였다. 

임금을 생각하고 어버이를 그리워한들 누가 알아나 주랴.

바야흐로 화창한 봄을 당하여 초목과 모든 생물이 다 스스로의 즐거움이 있는데, 

우리 형제 한 집안은 눈물이 가득찬 눈으로 서로 대하고 있구나. 

송추(松湫)의 옛 선영은 병화(兵火)로 연소되었으리, 어느 누가 한 사발 보리밥인들 무덤 위에 뿌려 주겠는가? 

 

 

5일 조카딸 예원이 병사했다.

9일 중형의 아들 가희도 병사했다. 그래서 형제가 짊어지고 나가서 물가에 매장했다. 

우리 형제의 자녀 여섯 명 중에 세 명은 바다에 빠져 죽었고 두 명은 왜의 땅에 죽었고 작은 딸 하나만이 남았을 뿐이니, 

가련하고 슬퍼서, 도리어 그들이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부러울 따름이다.

 

 

정월 그믐 경에 명나라 군사가 몰려와서 울산의 왜적 절반은 고래 밥이 되고 호남의 여러 소굴은 단지 순천에만 남았다고 들리니, 슬픈 심정 속에서도 기쁜 소식에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 죽사(竹肆)에 살던 사람이 임진년에 사로잡혔었는데, 왜경(倭京)에서 이예주로 도망해 왔다. 그가 날마다 찾아와서 말하기를,

“서로 조력하여 돌아가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당신의 힘을 입어 다시 고국의 천일(天日)을 보게 된다면 마땅히 죽음을 걸고 당신의 은혜를 갚겠소.”하였다. 

 

그는 은전도 가지고 있고 또 왜말도 잘하기에 애써 간청하였었다. 

마침내 5월 25일에 밤을 타서 서쪽으로 나와 밤에 80리를 걷고 나니, 두 발에 피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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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板島)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나가서 숲 속에 쉬어 있자니,

나이가 60여 세쯤 되어 보이는 한 늙은 중이 폭포에 몸을 씻고 쌀밥을 지어 해에 제사 지내고는 바위 위에서 졸고 있었다. 

그래서 통역이 가만히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서 서쪽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하자, 

 

그 중은 배로 풍후주(豐後州)까지 건너주겠다고 쾌히 승낙하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몹시 기뻐하며 중을 따라 내려왔다. 

통역이 앞을 서고 중이 다음에 서고 우리들은 조금 뒤떨어졌었다. 

그런데 열 걸음도 못 가서 한 왜적이 졸왜(卒倭) 두 사람을 거느리고 졸지에 와서 우리들을 보고 말하기를,

 

“도망하는 조선 사람들이다. 칼을 받아라.”

하므로, 우리들은 목을 내밀고 칼날을 받으려고 하자, 적은 졸왜로 하여금 붙잡아 끌게 하였다. 우리들이 판도 시문(市門) 밖에 당도하니, 

긴 나무 십여 개에 죽은 사람의 머리를 많이 달아 놓은 것이 있었다. 바로 적중의 고가(藁街)였다.

 

우리들을 그 아래에 앉히고 목을 벨 시늉을 하더니, 한 왜적이 칼을 끌어 당겨 정지시키고 우리들을 성중으로 보냈다. 

길이 시문(市門)을 거치자 한 왜인이 문 안으로부터 돌연히 나와서 끌고 들어가는데, 

바로 우리 집안을 사로잡은 신칠랑(信七郞)이라는 자였다. 

곧 차ㆍ술ㆍ국ㆍ밥 등을 먹여 주고 3일을 머물게 하고는 강제로 대진성(大津城)으로 보냈다.

 

 

이 해 6월에 좌도(佐渡)가 고성에서 군사를 철수하여 왜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곡(部曲)을 보내어 우리 집안을 왜의 서경인 대판성(오사카)으로 강제로 가게 하여, 배를 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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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떠난 지 8일이 되어 새벽녘에 곤히 잠이 들었는데, 배를 같이 탄 우리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경성이 이미 가까워졌다.’ 하므로, 

 

놀라 일어나 바라보니 멀리 구름 밖에 겹겹이 싸인 10층 누각이 푸른 바다 위로 솟구쳐 보인다.

담이 떨리고 정신이 싸늘해져서 오래도록 진정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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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들에게 빼앗긴 우리나라 병선들이 우치하(宇治河) 기슭에 놓여 있었다. 보니 마음이 괴로웠다.

 

애석하다 저 황룡축은 / 可惜黃龍舳

어찌하여 푸른 바다 동쪽에 있나 / 胡爲碧海東

장군이 군율을 잃은 게지 / 將軍自失律

제작이야 왜 잘 되지 않았겠는가 / 制作豈非工

위에는 비가 새서 아장이 꺾이고 / 上雨牙槳折

중권에는 호절(호랑이를 그린 기)이 보이지 않네 / 中權虎節工

내 삶이 진실로 범경 같으니 / 吾生猶泛梗

너를 보니 눈물이 절로 난다 / 見爾涕無從

 

 

복견에 당도하자 왜적은 우리 가족을 태창(太倉)의 빈 집에 데려다 두고서 늙은 왜인 시촌(市村)으로 하여금 맡아 지키게 하였다. 

 

적괴 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죽자, 북쪽 교외에 매장하고, 그 위에다 황금전을 짓고, 왜승 남화가 큰 글씨를 써서 그 문에 새기기를,

 

크게 밝은 일본이여 한 세상 호기 떨쳐라 / 大明日本 振一世豪

태평의 길 열어 놓아 바다 넓고 산 높도다 / 開太平路 海濶山高

 

구경 삼아 한 번 놀러갔다가 하도 어이가 없기에 붓으로 쭉쭉 문질러 버리고 그 곁에다 이렇게 써 놓았다.

 

반 세상의 경영이 남은 것은 한줌 흙만 / 半世經營土一坏

십층의 황금전은 부질없이 높다랗군 / 十層金殿謾崔嵬

조그마한 땅이 또한 다른 손에 떨어졌는데 / 彈丸亦落他人手

무슨 일로 청구에 권토하여 오단말가 / 何事靑丘捲土來

 

왜승 묘수원의 순수좌라는 자가 뒤에 와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지난번에 대합(大閤)의 총전(塚殿)에 붙은 글씨를 보니, 바로 당신의 글씨였습니다. 왜 스스로 몸을 아끼지 않습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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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왜(守倭) 시촌(市村)이라는 자가 찾아와 우리 집안사람들더러 하는말이

"당신네들끼리야 남남 사이와는 다르지 않나 형이니, 아우니, 조카니, 아재비니 서로서로 번갈아 드나들어도 좋지 않나"하였다,

이 말 끝에 명나라 차관 모국과(茅國科)와 왕건공(王建功) 등이 사개(沙蓋)에 묵고 있는것을 알았다.

 

우리나라 사람 신계리와 함께 그곳에 가서 문을 두드려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고 들어갔다. 

두 차관은 서쪽으로 향해 의자에 앉고 나에게는 의자 하나를 주어 동쪽으로 향해 마주 앉게 하고는 지극히 따뜻하게 대해 주고 차와 술을 내왔다.

 

나는 울면서 청하기를,

“머잖아서 배를 정비하여 짐을 보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 배편에 졸병 한놈을 데리고 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니, 차관의 얼굴에는 동정하는 빛이 떠올랐다.

“공은 어떤 왜인에게 의탁하고 있는가?”

하였다. 좌도(佐渡)라고 하자, 천장은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가강(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말하여 좌도로 하여금 그대를 보내 주도록 하겠다.”하였다. 

 

신계리라는 자는 본시 경박하여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며 하는 말이,

“수길이가 죽어서 나라에 장차 큰 난리가 날 것이니 왜적은 앞으로 다 죽을 것이다.”

하니, 대마도 통역이 우리나라 말에 통달하여서, 달려가서 전수(典守)하는 자인 장우문(長右門)에게 고하였다. 

장우문은 행장(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의 형인지라, 우리가 문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포박하여 별실에 가두었고, 

신계리는 별도로 다른 곳에 포박하여 두었다.

 

저녁에 수레에 걸어 사지를 찢어 죽일 모양이므로 명나라 차관도 거듭 용서해 주기를 부탁했다.

“저 사람이 찾아온 것은 단지 늙은 자기 아버지의 소식을 묻기 위함이요, 다른 사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니, 장우문은 그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서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죄인이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사생을 초월한 때문이다. 

돌아와서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두 형과 마주 앉아 한바탕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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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본태합기 
(繪本太閤記)  코무덤에 들려 제사지내는 조선통신사  )

 

 

 

수길이 우리나라를 재침략할 적에 여러 장수에게 명하기를,

“사람의 귀는 둘이지만 코는 하나다.” 하고,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하나씩 베어서 수급(首級)을 대신케 하였다. 

그것을 왜경으로 수송케 하여 쌓아 놓은 것이 하나의 구릉을 이루자 대불사(大佛寺) 앞에 묻으니 거의 애탕산(愛宕山 아타고 산)의 산허리와 그 높이가 같았다. 

혈육의 참화는 이를 들어 가히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을 모아 제사 지내려고 하면서 나에게 제문을 지으라고 하기에 다음과 같이 지었다.

“귀와 코는 서쪽 능성이 되었으니 뱀처럼 사나운 놈들이 동쪽에 묻었네. 

마른 고기 되어 소금에 절이고 물고기 밥으로 배 불렸으니, 차마 향불을 올리지 못하네”

 

 

 

경자년(1600, 선조 33) 2월에 적장 좌도가 수왜(守倭)를 불러 우리 가족들의 단속을 좀 허술하게 하도록 이르니, 수왜는 바로 나가 버렸다,

그래서 바로 순수좌를 찾아가 보고서 돌아가기에 편리한 길을 알아보았다. 

 

일기도(壹岐島 이키 섬)에 이르러서 풍우 때문에 열흘 동안을 머무르고 산에 올라 하늘에 바람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이튿날 새벽에는 별과 달이 밝았고 풍백이 길을 인도했다. 때는 5월 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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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이야기.jpg 참고

간양록

조선시대 문신 강항(1567~1618)이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겪었던 참상을 기록한 포로기

 

1책. 목판본. 원래 저자는 죄인이라는 뜻에서 이를 ‘건거록(巾車錄)’이라 하였는데, 1656년(효종 7) 가을 이 책이 간행될 때, 그의 제자들이 책명을 지금의 것으로 고쳤다. ‘간양’이란 흉노땅에 포로로 잡혀갔던 한나라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에 강항의 애국충절을 견주어 말한 것이다. 『수은집(睡隱集)』의 별책으로 간행되기도 했는데, 유계(兪棨)의 서문과 제자 윤순거(尹舜擧)의 발문이 실려 있다. 규장각도서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은 적지에서 임금께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疏)」와 당시 일본의 지도를 그린 「왜국팔도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 포로들에게 준 고부인격(告俘人檄), 귀국 후에 올린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적국에서의 환란생활의 시말을 기록한 「섭란사적(涉亂事迹)」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들은 적국에서 당한 포로들의 참상과 그곳에서 보고 들은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란에 대비해야 할 국내정책에까지 언급하고 있는 충절의 기록이다. 이 책은 민족항일기에 분서(焚書)의 화를 입어 현재는 희귀본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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