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마시술소 여자들 30.거봐요 - 완결
2014년 10월 24일 07시 51분에 베스트로 선정 되었습니다.♡
30. 거봐요
그대로 얼어붙은 채
눈만 껌뻑이고 있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님에도
그녀가 직접 내뱉은 그 말은
강렬하게 뒤통수를 때린다.
“......”
“......”
끝도 없는 침묵이 이어진다.
꼭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보다는
입 자체가 열리지 않는다는 게 맞을 듯.
내가 입을 열면
수십 개의 화살이 튀어나와
그녀의 가슴팍에 가서 박힐 것만 같다.
“......”
“가요.”
채연이 먼저 침묵을 깨고
돌아서서 걷기 시작한다.
몇 발자국을 앞서 나갈 동안
그 자리에 선 채 멍하니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내가 사는 아파트를
완전히 등질 때까지
어느 쪽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알고 있었죠?”
“네?”
“......”
어느 순간엔가
채연이 나지막히 말을 꺼낸다.
갑자기라고는 해도
두 귀에 똑똑히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못 들었다는 듯 되묻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라서.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면
‘그런 애들인거 다 알면서 상대해준거야.’
가 될 거 같고
몰랐다고 대답하면
‘그럴 줄은 몰랐다. 실망이다.’
가 되어 버릴 거 같다.
그렇다고 그냥 입다물고 있으면
그녀의 질문에 긍정하는 것이므로
못 들은 척 되물은 것은
최선의 선택인 듯.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문다.
차라리 이게 좋다.
어설픈 대화 시도는
위선이고 가식일 거 같다.
이렇게 회피하는 것이 낫다.
나와 상관없는 일인양
무책임한 것이 오히려 더 좋다.
그녀가 사는 곳 방향으로
또 하나의 건널목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평소에 다니던 길이 아니므로
생각지 못한 장애물에 적잖이 당황한다.
또 한 번 가던 길을 멈추는 것은 곤란하다.
지금까지 아무 얘기도 없었던 것은
걷고 있었던 탓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좋다.
저 앞에서 멈추게 되면
그녀는 또 무슨 말을 할 것이며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내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하필이면 신호는
우리 바로 앞에서 끊긴다.
멀리서부터 걸음을 재촉했거나
파란불이 깜빡일 때 뛰었다면
충분히 건널 수 있었을 터.
그러나 채연은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고
나는 차마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과는 지금과 같이.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자
그녀는 천천히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다른 곳을 보는 척하려 했으나
조금 타이밍이 안 맞았다.
뒤늦게 눈을 돌리는 것은
그녀를 피하고 있음을 알리는 꼴.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제 혼자 가도 되는데.”
“......”
“들어가세요.”
이 상황이 곤란한 상황임은 알지만
돌아설 마음은 추호도 없다.
방금 한 말은 진심이 아닐 것,
그녀 또한 지금 상황이 어색한 것일 뿐.
“여기까지 왔는데...”
“......”
“그냥 집까지 바래다 줄게요.”
“......”
“조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마도 그녀를 만난 뒤 처음으로
내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한 것 같다.
채연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 웃어보인다.
다행이다, 웃어서.
곧 신호가 바뀌었고
우리는 나란히 건널목을 걸었다.
역시나 말은 없는 상태.
“저녁은 먹었어요?”
“네...아 아뇨.”
길을 다 건너자
채연이 조용히 물어온다.
분명히 먹고 나와놓고는
급하게 말을 바꾼다.
혹시 그녀는 안 먹었을까봐.
“난 먹었는데.”
“네;”
쓸데없는 짓이었다.
“뭐하느라 이 시간까지 저녁을 안 먹어요?”
“아뇨...뭐...그냥 생각이 없어서.”
저녁에 먹은 갈비찜이
눈 앞에서 왔다갔다 한다.
“그래도 밥은 잘 챙겨먹어야죠. 야간에 일하는 사람이.”
“네...”
“배 안 고파요?
“조금요.”
다시 일상적인 얘기로 돌아온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조금이나마 어색함이 가시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
“피씨방 일은 계속 하실 거예요?”
“아뇨. 이제 곧 그만두려구요.”
“왜요? 힘들어서요?”
“아니 뭐 딱히 힘든 건 없는데...”
“그런데 왜요? 아직 복학할 때도 아닌데. 이제 돈 좀 벌었다 이건가요?”
“그게 아니라...”
은근슬쩍 장난을 걸어온다.
다행이다.
이제 다시 채연의 원래 모습이 보인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더라구요.”
“뭐가요?”
“돈이 손에 좀 들어오면 일을 안 하려고 하죠.”
“그런 거 아닌데...”
“다 천성이 게으른 탓이죠.”
“아뇨, 전 그게 아니...”
“있는 놈들이 더한 법이죠.”
“아...”
너무 심하게 돌아와버렸다;
또 그 집요한 장난이 시작된다.
“언제 그만 둬요?”
“글쎄요...조만간...”
“역시 돈이 좀 있으니까 일하기 싫죠?
“그게 아니라...사층에 조만간 주점이...”
말을 꺼내다 말고
곧 입을 다물어 버린다.
이제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미리 그만둔다는 소리나 마찬가지.
그보다
사층이라는 말을
꺼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므로.
“그만 두고 뭐할 거예요?”
“글쎄요...아직 계획은 없는데...”
다행히도
조금 전에 실수로 한 말에 대해서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하다.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경림이 사는 아파트단지 옆을
스쳐지나간다.
이제 곧 그녀가 사는 곳이
나타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가 사는 곳도,
그녀와의 만남도.
“여자친구는 있어요?”
“아 아뇨;”
“없을 거 같아요.”
“네...”
너무하는군;
“여자친구 있는 사람이 야간에 일할 리가 없죠.”
“그러는 채연씨도 뭐...매일 밤마다 피씨방...”
또 한번의 말실수를 저지를 뻔한다.
그저 장난삼아 맞받아치려던 것뿐인데.
그녀가 했던 일과 관련된 얘기들은
해서는 안 되는데.
“맞아요. 그래서 저도 남자친구 없죠.”
“네...”
다행히도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하지만
내 얘기가 씁쓸하지는 않을지.
“그치만 난 달라요.”
“네?”
“나는 재석씨랑은 다르거든요?”
“......”
나는 여자친구가 없어서 밤에 일하고
자기는 밤에 일하기 때문에
남자친구가 없다는 소리인가.
너무 자신에게만 관대한 거 아닌가.
“나는 다르죠. 나는...재석씨랑은 다른 사람이잖아요.”
“다른 사람요?”
“나는...재석씨처럼 평범하지 않거든요.”
“......”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아주 잠깐 밝아지는 듯했으나
결국에는 그 자리로.
“...뭐가 달라요.”
“......”
울컥
하고 말을 뱉어내고 말았다.
갑자기 화가 난다.
“뭐가 그렇게 다른데요? 까짓 안마시술소...”
“......”
잔뜩 흥분한 상태로
여지없이 실수를 하고 만다.
흥분은 금물.
끝까지 조심해야 했는데.
“......”
“아니...그게...”
“......”
“......”
잠시 처량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홱 돌아서서
“달라요!” 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녀들의 집이 보인다.
안타깝게도
흥분된 머리가 식지를 않는다.
멍하니 그녀가 가는 모습을 보다가
재빨리 뛰어가서 팔을 잡는다.
어차피 다신 안 볼 거,
할 말은 해야겠다.
그녀들이 사는 원룸 앞이다.
“뭐가 다르다는 건데요?”
“......”
“어차피 똑같은 사람 아니에요? 똑같이 태어나서 똑같이 게임도 하고, 똑같이 커피도 마시는데, 다른 건 도대체 뭐예요?”
“......”
꽤나 심하게 흥분했나 보다.
내가 한 번에 저만큼 많은 대사를 할 줄이야.
게다가 더듬지도 않았다.
“...달라요.”
“하...”
채연은 ‘달라요’만을 반복한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결국 이성이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눌러왔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러니까 뭐가요. 까짓 안마...에이 씨, 안마시술소 다니는 여자는 사람도 아닙니까?”
“......”
잠시 침묵이 흐른다.
뒤늦게야 잠깐 정신이 나갔었음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채연은 고개를 숙인 채로다.
내가 악을 쓰며 호통을 치긴 했지만
자기가 마치 죄인인양 얼굴을 들지 않는다.
나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 자신보다는 세상이 그렇게 취급했을 것.
한동안 고요함이 이어지다
곧 그녀가 얼굴을 들고는
조용히 입을 연다.
“재석씨...”
“...네.”
“그러면요...”
“......”
나도 모르게 흥분해 버린 것을 후회하는 중.
금세 끓었다 식어버리는
냄비같은 성격인지라
소심한 목소리로 조용히 그녀의 말에 응수를 한다.
“네, 얘기해요.”
“재석씨 그러면...”
“......”
“나랑...사귈 수 있어요?”
“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움찔 놀라
나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난다.
심장이 요동을 치고
머리 속이 어지러워진다.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지?
채연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굳게 입을 다문 채로다.
방금 내뱉은 말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줄 용의는 없어 보인다.
나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굉장히 낯설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내게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지금까지 흥분해서
그녀에게 쏟아낸 말들은
전부 다 가식이고,
위선이었단 말인가.
만약 그녀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안마시술소 여자라는 걸 스스로 밝히지 않았더라면
다를 수 있었을까.
침묵이 길게 이어진다.
시간은 꽤나 흘러갔다고 생각된다.
나는 여전히 답변을 찾지 못하고 있다.
채연은 다시 서서히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한다.
“...거봐요.”
아무 변명도 할 수 없다.
채연은 돌아서서 계단을 오른다.
나는 그녀를 잡지 못한다.
바람이 차갑게 몰아친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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