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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조원규의 시원한 籠談] 시래대잔치의 추억(2011년 농구대잔치)

일병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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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9 (월) 21:41

                           



[점프볼=조원규 칼럼니스트] 포인트가드의 교과서. NBA 역사상 가장 많은 어시스트와 스틸을 기록한 존 스탁턴을 일컫는 말입니다. 농구선수로는 작은 키에 평범한 운동능력. 고등학교 졸업 당시 존 스탁턴을 원하는 대학은 많지 않았습니다. 곤자가 대학의 제이 힐록(Jay Hillock)만이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죠. 그가 밀어붙여서 존 스탁턴은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은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당시 명지고 코치였던 김현주 코치는 그를 불러 ‘갈 대학이 없다. A대학에 가려면 1년을 유급해야 한다’고 했다. 김시래는 농구를 그만두겠다고 했고, 김현주 코치는 그의 모교였던 명지대에게 부탁해 김시래를 겨우겨우 대학에 입학시켰다.”





 





2011년 점프볼 기사입니다. 당시를 회고하며 김시래는 “농담으로라도 우리 팀에 오라고 해주는 곳이 없었기에 정말 절망적이었다”고 얘기했습니다. 김현주 코치의 부탁으로 명지대에 입학했지만, 그는 대학에 입학해서도 더 이상 운동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가장 먼저 프로팀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2011 농구대잔치의 활약이 없었다면 1순위 지명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 시래대잔치가 된 농구대잔치





 





 





김시래는 2011년 농구대잔치 6경기에서 평균 39분 47초를 뛰며 25.5득점 8어시스트 6.2리바운드 2.7개의 스틸을 기록했습니다. 팀은 역대 최고 성적인 준우승을 기록했습니다. 그 해 명지대의 대학리그 성적은 8위입니다. 9번을 이기고 13번을 졌습니다. 9번 중에 7번은 하위권 팀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것이었고,  플레이오프에 초대받지 못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7월에 열린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도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연세대와 건국대에게 연패하며 예선 탈락. 연세대에게 1쿼터 4-29의 굴욕을 당하며 30점차로 졌습니다. 건국대전 역시 1쿼터부터 12-30으로 밀렸습니다. 그나마 경기 막판 맹추격으로 점수차를 9점까지 좁힌 것이 다행인 경기였습니다.





 





그랬던 명지대가 8강에서 연세대, 4강에서 건국대를 차례로 이겼습니다. 김시래는 연세대와 경기에서 33득점 5어시스트, 건국대와 경기에서 28득점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연세대전에서 승부처인 4쿼터에만 12점을 집중했습니다. 건국대전은 동점 상황에서 경기 종료 0.1초전 자유투를 얻어냈고, 모두 성공시켰습니다. 상무와의 결승전에서도 26득점 8어시스트로 맹활약했습니다.





 





언론에서 먼저 농구대잔치를 ‘시래대잔치’라 표현했습니다. 1983년부터 시작된 한국 최대 규모의 아마추어 농구대회. 농구대잔치가 배출한 스타는 많았지만 누구도 농구대잔치를 본인의 이름으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대학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던 서장훈, 상무와의 데뷔전에서 21득점 25리바운드의 괴물 스탯을 기록한 오세근도 ‘농구’ 대신 본인의 이름을 새기지는 못했습니다. 명지대의 돌풍이 그만큼 놀라웠고, 팀 득점의 절반 이상을 만들어낸 김시래의 활약은 그만큼 뛰어났습니다.





 





▲ 시래대잔치의 시작





 





“박지훈(현 원주 DB)과 대학에서 치르는 마지막 대회였어요. 마음을 내려놓고 편하게 경기했습니다. 컨디션도 좋았고, 원하는 플레이가 다 되는 느낌이었어요. 경기를 치를수록 자신감은 더 커졌고요. 결승에서 상무를 만났을 때에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2018년 2월의 김시래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마음을 비운 김시래의 컨디션은 절정이었고, 동기 박지훈과의 호흡 역시 최상이었습니다. 김기성은 필요할 때 득점을 만들었고, 김수찬과 배강률은 신입생다운 파이팅으로 팀의 에너지 레벨을 끌어올렸습니다. 특히 박지훈과 김기성은 시래대잔치 흥행의 명품 조연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명지대의 돌풍은 첫 경기부터 예고됐습니다. 상대는 대학리그 플레이오프에서 중앙대를 이기고 4강에 오른 한양대. 대학 최고 슈터 차바위와 탁월한 속공 전개가 장점인 이재도가 이끄는 팀입니다. 루키 정효근과 한상혁의 가세로 전력은 더 강해졌죠. 그런데 이 팀에게 최다 21점까지 앞서나가는 경기를 합니다. 4쿼터에 동점을 허용하기도 했지만, 뒷심에서 앞서며 95-87로 승리. 탄탄한 전력과 승부처에서의 결정력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는 경기였습니다.





 





다음 경기는 상명대. 대학리그에서 단 2승만 올린 팀입니다. 2승의 제물에 명지대 이름은 없었고, 이 경기 역시 명지대가 승리하면서 결선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합니다. 예선 마지막 상대는 전통의 강호 고려대였습니다. 이 경기에서 명지대는 93점을 올렸지만 102점을 실점하며 대회 첫 패배를 기록합니다. 그러나 팀의 패배에도 30득점 14어시스트로 김시래는 빛났습니다.





 





2011년 농구대잔치 예선 김시래 기록

상대팀_ 기록

한양대_ 22득점 8어시스트 7리바운드 3스틸

상명대_ 14득점 9어시스트 10리바운드 2스틸

고려대_  30득점 14어시스트 7리바운드 5스틸





 





예선을 통과한 팀은 상무와 연세대, 건국대와 경희대, 고려대와 명지대였습니다. 건국대는 예선에서 우승후보 경희대의 35연승을 저지하며, 예선전 최대 이변의 주인공이 됩니다. 경희대는 2011년 대학농구리그 전승 우승팀. 대학농구에 적응을 마친 김종규, 김민구, 두경민 3인방에 슈터 박래훈과 배병준, 살림꾼 최지훈 등 탄탄한 전력을 갖춘 팀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상무와 경희대를 우승후보로 예상했습니다. 그 팀에게 건국대는 시종 리드하며 7점 차로 승리했습니다.





 





추첨을 통해 상무와 건국대는 4강에 직행. 경희대와 고려대의 승자가 상무와 만나고, 연세대와 명지대의 승자가 건국대를 만나는 대진표가 만들어졌습니다. 명지대가 6강에서 만난 연세대는 대학리그 2위 팀으로 최강 경희대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 기존의 김승원, 장민국, 김민욱에 김준일과 주지훈을 영입하며 대학 최고의 높이를 구축했습니다. 2번 성향의 김지완과 박경상에 특급 가드 김기윤이 합류하면서 약점을 보완했습니다. 전준범과 정준원은 외곽을 책임졌죠. 명지대는 야심차게 영입한 안진모(201cm)와 이진우(201cm)가 부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둘을 대신해 신입생 배강률(196cm)와 언더사이즈 박지훈(193cm)이 포스트에서 경쟁해야 했습니다. 높이에 대한 부담은 빠른 농구를 강요했으나, 속공의 시작인 리바운드에서 경쟁력이 떨어졌습니다. 12개 팀 중 3점슛의 성공 확률이 가장 높았지만, 대학농구리그에서 8위에 그친 이유입니다.





 





▲ 명지대의 해피 크리스마스





 





 





“성적에 욕심은 없었어요. 마지막까지 후회 없는 경기를 하자고 (박)지훈이와 약속했죠. 감독님께도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 저희는 프로에 갈 준비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감독님은 더 하라고 하셨죠(웃음).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대학 최고의 높이 연세대와 높이가 약점인 명지대의 대결. 명지대의 승리는 그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대학리그 두 경기에서 연세대는 206점을 득점했고 146점을 실점했습니다.





 





MBC배의 30점차 패배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선수들의 기량, 높이, 벤치의 두꺼움까지 무엇 하나 명지대가 연세대보다 나은 것은 없었습니다. 모두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드진의 스피드는 명지대가 빨랐습니다. 그리고 승리에 대한 열망도 명지대가 더 뜨거웠던 것 같습니다. 명지대는 1쿼터부터 주지훈에게 많은 득점을 허용했습니다.





 





주지훈이 혼자 10점을 올리고 박경상과 전준범이 득점에 가세하면서 1쿼터는 16-27. 2쿼터에는 명지대의 압박수비가 빛났습니다. 연세대에게 13점만 허용했고, 김기성의 득점을 앞세워 44-40으로 리드. 3쿼터에는 압박수비의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체력이 떨어지며 58-68로 재역전.





 





운명의 4쿼터. 김시래의 3점슛을 시작으로 신입생 김수찬과 배강률이 득점에 가세했습니다. 명지대가 20점을 올리는 동안 연세대에 불과 2점만 허용하며 78-70으로 역전. 연세대는 박경상과 김기윤의 3점포로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종료 51초 전, 박지훈이 쐐기 3점포를 성공시키며 사실상 경기를 마무리했습니다. 명지대는 4쿼터에만 30점을 올렸고, 김시래는 그 중 12점을 책임졌습니다. 압박수비 대신 선택한 3-2지역방어가 성공하며 연세대의 득점을 13점으로 제한했고, 턴오버는 속공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연세대는 주전 빅맨 김승원이 결장했지만 높이 싸움에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습니다. 예비 신입생 주지훈이 33득점과 1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명지대 골밑을 유린했죠. 높이의 열세를 극복한 것은 백코트였습니다. 김시래와 김기성은 3점슛 9개와 57득점, 7개의 어시스트를 합작했습니다. “혹자는 전성기 허재와 강동희의 조합을 봤다고 과장 섞인 농을 던질 정도였다. 연세대는 이들의 코트 초토화에 두 손 두 발 들며 명지대의 희생양이 됐다.” 점프볼은 두 가드의 활약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시래는 “이번 경기가 내 대학시절 최고경기다. 너무 짜릿하게 이겼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시래는 대학 4년 내내 연세대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첫 승리가 이 날이었죠. 김시래는 대학 시절 최고의 경기를 했고, 박상관 감독은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 경기는 열린 날은 2011년 12월 25일이었습니다.





 





▲ “살벌했다” “운이 좋았다”





 





“연세대를 이기고 성적에 대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 전까지 성적에 대한 욕심은 없었어요. 대학에서 처음 연세대를 이기면서 남은 경기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다른 팀에서 경기를 했던 선수들이 나중에 ‘그 때는 살벌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저는 ‘운이 좋았다’고 애기했습니다.(웃음)”





 





준결승 상대는 건국대. 건국대는 예선에서 우승후보 경희대를 이긴 팀입니다. 드래프트 1순위의 가장 유력한 후보 최부경이 있는 버거운 상대입니다. 이원대와 한호빈의 백코트 조합은 대학 최고 수준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였고, 성재준의 외곽포로 인해 내외의 득점이 조화를 이룬 팀이었습니다.





 





명지대와 건국대는 2011년에 세 번을 만났습니다. 5월에 열린 대학리그 1차전은 77-61로 건국대의 완승. 7월에 만난 MBC배 역시 87-78로 건국대가 승리했습니다. 최부경이 36득점 15리바운드로 명지대 포스트를 농락했습니다. 11월에 열린 대학리그 2차전은 명지대가 3점차로 승리. 이미 순위가 정해진 가운데 건국대는 최부경의 출전시간을 관리했습니다. 최부경의 득점은 MBC배의 절반인 18점이었고 리바운드도 10개를 넘지 않았습니다.





 





농구대잔치 전까지 공식 기록은 1승 2패. 그러나 1승이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합니다. 최부경의 출전시간을 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여기에 건국대는 대학 최강 경희대를 이긴 기세가 있습니다. 기세 싸움에서도 명지대에 밀릴 이유가 없습니다. 4강에 직행하며 체력 역시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준결승에서 만난 건국대는 하위권 팀 명지대가 넘기에는 높은 산이었습니다. 이 경기 역시 명지대는 스피드를 앞세웠습니다. 상대적으로 느린 건국대를 전반부터 몰아붙여 44-29로 전반을 리드. 김시래와 김기성은 이 날도 전반에만 30점을 합작했습니다. 후반은 건국대의 매서운 추격과 명지대의 뿌리치기가 반복됐습니다. 건국대는 3쿼터에 점수차를 7점으로 좁혔고, 경기 종료 8.7초를 남기고 성재준의 3점포로 75-75로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명지대의 마지막 공격. 김시래는 0.1초를 남기고 돌파 공격을 시도해 자유투를 얻어냈습니다. 자유투 두 개가 모두 림을 통과하며 명지대는 사상 처음으로 농구대잔치 결승에 올랐습니다.





 





이 경기로 인해 김시래의 주가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대학 최고의 포인트가드’는 ‘대학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당해 드래프트의 가장 유력한 1픽 후보는 최부경. 최부경의 아성을 위협할 선수는 김승원과 최현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예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드가 필요한 팀은 김시래를 1픽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가드가 필요한 모비스는 김시래를 선택했습니다.





 





▲ 내가 봐도 미쳤던 것 같다





 





과거 기록을 뒤적이다 재미있는 인터뷰를 찾았습니다. 명지중학교 시절이 가장 재미있게 농구했던 시절이라는 내용입니다. 당시 명지중 코치는 김상준 감독입니다. 김상준 감독은 김시래를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도 김시래입니다. 2011년 4월까지 중앙대 감독으로 분석했고, 이후에는 예비 드래프티로 관찰했던 김상준 감독은 당시 김시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가장 큰 차이는 자신감입니다. 플레이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어요. 자신감이 붙으면서 경기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김상준 감독에게 당시 김시래에 대해 물었고, 김 감독은 가장 큰 변화를 자신감에서 찾았습니다. 그 자신감의 원천이 궁금했습니다.





 





“정말 모든 걸 다 걸었죠. 만약 그 기회도 잡지 못하면 농구를 정말로 그만 둘 생각이었어요. 절박함이라고 해야 하나. 농구를 잘하지 못하니 뛰는 거라도 잘하자는 생각으로 정말 죽도록 달리기만 했어요.”





 





대학 입학조차 어려웠고,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면 선수 생활을 접겠다고 생각한 김시래에게 기회는 우연치 않게 왔습니다. 1학년 MBC배 대학농구대회 첫 경기에서 주전가드 박대남의 컨디션 난조를 보인 것입니다. 컨디션이 좋았던 김시래는 이 경기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였고, 이후 키 식스맨으로 투입되며 코칭스텝과 동료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2009년 박대남의 프로 진출로 야전 사령관 자리가 공석이 됐습니다. 박상관 감독은 그를 불러 “이제 네가 주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시래는 죽을힘을 다해 뛰었습니다. 트랙훈련이나 달리기 훈련에서 단 한 번도 일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습니다. 후일 “내가 봐도 미쳤었던 것 같다”고 회상할 정도로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땀의 결과는 대체로 정직합니다. 김시래는 2010년 6월 단국대전에서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며 화제가 됐습니다. 이상민 이후 14년 만에 대학농구에서 나온 어시스트 동반 트리플더블이었습니다. 2011년에는 대학리그 어시스트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기록한 평균 7.59개의 어시스트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김시래는 자신감을 축적했고, 대학 마지막 대회에서 제대로 사고를 쳤습니다.





 





 





 





▲ 다시 시래대잔치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훈련하면 반드시 기회가 옵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





 





고등학교 코치의 부탁으로 간신히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선수. 대학에 입학하면 농구를 그만두려고 했던 선수. 그러나 농구를 그만두기 전까지 훈련을 그만두지는 않았습니다. 주어진 환경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동기들 중 가장 먼저 프로에 지명을 받았고, 지금도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시래는 2012-2013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의 기쁨도 누렸습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평균 30분 34초를 뛰며 10득점 5어시스트의 신인답지 않은 활약. 드래프트 이전부터 김시래를 “급이 다르다”고 평가했던 유재학 감독은, 우승 이후 “내가 선수 보는 눈이 맞았다”며 즐거워했습니다. 2015년에는 농구대잔치 우승과 MVP 수상으로 2011년 결승전 패배의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지금 가장 큰 목표는 창원 LG에서 꼭 우승하는 것입니다. 우리 팀이 별이 없잖아요. 유니폼에 별을 새기고, 팬들의 가슴에 김시래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새기고 싶어요.”





 





한국 나이로 서른 살. 어느덧 중견 프로선수. 김시래는 다시 시래대잔치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꿈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땀의 가치’를 아는 선수가 흘리는 ‘땀의 빛깔’은 보석보다 영롱합니다.





 





#사진=문복주, 한필상 기자





#본 기사는 점프볼 2018년 3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2018-03-19   조원규([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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