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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스플 야구인] 아버지는 ‘최동원상’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일병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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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1 (수) 18:25

                           
아버지는 아들이 진행하는 '최동원상'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만약 기력이 남아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니, 밥은 묵고 다니나”
 
[엠스플 야구인] 아버지는 ‘최동원상’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엠스플 야구인]
 
# “어디 가노?” 아버지가 물었다. “요 앞에 가는데예” 아들이 답했다. 아버지는 더는 묻지 않았다. 아들이 간 곳은 시위현장. 대학 총학생회장이던 아들은 1987년 6월 10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이끌었다. 최루탄 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된 아들이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물었다. “밥은 묵었나?” 
 
아들은 사회에 나와선 노동운동을 했다. 아들은 건설사 노조위원장을 맡아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그때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별 말하지 않았다. “밥은 묵고 다니나”. 그게 아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한 유일한 말이었다.
 
아들은 30대 후반에 호텔 경영자가 됐다. 부도 난 호텔의 위탁경영자가 된 것. 아들은 용역이던 직원들을 정식직원으로 채용했다. 매출 목표를 초과하면 성과급도 약속했다. 주변에선 그런 아들을 두고 말했다. “회사 경영이 무슨 장난인 줄 아느냐”고.
 
하지만, 아들은 약속을 지켰다. 호텔은 두달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매출목표 초과로 성과급까지 줄 수 있었다. 사장 명함 뒷면에 객실 요금표를 적은 아들의 집요함이 거둔 성과였다. 사회운동가에 이어 호텔 경영자로도 성과를 낸 아들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니 요즘 바쁜데, 밥은 묵고 다니나” 
 
[엠스플 야구인] 아버지는 ‘최동원상’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아들은 강진수. 그가 현재 가장 좋아하는 직함은 ‘최동원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다. 부산에서 유명 한우집을 운영하는 그다. 다른 직함도 많다. 하지만, 그는 손사래를 친다. 최동원기념사업회 사무총장으로 불러주소. 그게 내한텐 가장 듣기가 좋아요.
 
사단법인 최동원기념사업회. 그해 최고의 프로야구 투수를 뽑는 ‘최동원상’의 주최자다. ‘최동원 야구교실’을 운영하는 곳이다. 각종 최동원 추모사업을 진행하는 곳이다. 
 
주변에선 강진수를 ‘최동원 박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강진수는 최동원을 만난 적이 없다. 최동원 기념에 나선 것도 최동원이 세상을 떠난 후였다.  
 
2011년 10월이었을 거예요. 부산일보에서 한달 전 세상을 떠난 고 최동원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을 재조명하는 기획기사를 냈어요. 그 기사를 보고 크게 감동했죠. 마침 부산일보에서 ‘최동원 기념 야구박물관을 짓자’고 제안했어요. 저도 ‘동참하겠다’고 했죠. 부산이 낳은 영웅을 초라하게 보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박물관을 세우는 덴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다. 강진수와 뜻을 함께 한 권기우 변호사, 부산일보 등은 박물관에서 동상 건립으로 계획을 바꿨다. 그리고 2013년 9월 14일. 고 최동원 2주기를 맞아 부산사직구장 앞에서 ‘최동원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모두가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던 동상 건립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여세를 몰아 최동원 동상 건립을 추진했던 이들은 ‘사단법인 최동원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강진수가 사무총장을 맡았다. 그리고 이때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최동원상(賞)’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엔 ‘사이 영상’, 일본 프로야구엔 ‘사와무라상’이 있습니다. 그해 프로야구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타의 모범이 되는 최고 투수에게 주는 상이죠.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는 출범 30년이 지났는데도 그런 상이 없었어요. 그때 우리에게도 ‘최동원’이란 영웅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최동원은 최고 투수이면서도, 선수회를 결성해 2군 선수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선 ‘참된 야구인’이었습니다. ‘최동원이라면 사이영이나 사와무라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상징성이 있다’고 본 거죠. 강진수의 말이다.
 
2014년 11월 11일. 제1회 최동원상 시상식이 열렸다. 초대 수상자는 KIA 타이거즈 투수 양현종. 
 
양현종이 수상하자 당시 한 야구해설가는 “부산에서 제정된 ‘최동원상’ 초대 수상자가 호남 출신의 양현종이란 걸 주목해야 한다”며 “선수회 결성을 통해 구단, 지역, 연차, 1-2군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선수가 하나가 되길 바랐던 최동원의 유지가 30여 년이 흘러 양현종 수상으로 꽃을 피운 게 아닌가 싶어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강진수는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는 지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묵고 다녀야 한데이” 
 
[엠스플 야구인] 아버지는 ‘최동원상’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2018년 11월 10일. 다음날 열릴 제5회 최동원상 시상식을 앞두고 강진수는 바빴다. 시상식 준비는 기본, 수상자와 수상자 가족을 일일이 챙겨야 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야구 원로를 모시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여기다 시상식 사회도 그가 맡아야만 했다. 유명 사회자를 부를 돈으로 '아마추어 투혼 최동원상' 수상자에게 더 많은 장학금을 주는 게 낫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최동원기념사업회 관계자는 “500명 정도가 시상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프로야구계에서 비중 있는 상으로 발돋움한 ‘최동원상’ 시상식은 챙겨도 챙겨도 끝이 없는 전쟁이었다. 물론 그 전쟁을 치러도 강진수가 얻는 건 없었다. 아이고, 죽겠으요. 그래도 마 우짭니까. 돌아가신 (최)동원이 형과 동원이 형 어머님이 일 년 중에 가장 기뻐하실 날일텐데, 내가 힘들어도 챙겨드려야죠.
 
피곤이 가득한 강진수는 두 눈을 거칠게 비볐다. 하지만, 그때까지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강진수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걸. 강진수가 혹시라도 아버지의 임종을 놓칠까 봐 수시로 병원을 찾는다는 걸.
 
강진수는 말하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일이라도 아버지가 병원 침대에서 일어나 “니, 밥은 묵고 다니나”며 말할 것만 같았으리라.
 
11일. 제5회 최동원상이 무사히 끝났다. 강진수는 행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내년에도 최동원상이 진행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부탁한다”는 건배사도 빼놓지 않았다. 환한 표정으로 건배사를 하는 강진수의 눈은 그러나 붉게 충혈돼 있었다. 
 
그리고 두 시간이 흘러. 강진수에게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부고 문자였다. 장례식장에서 강진수의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총장님 없었으면 ‘최동원상’ 시상식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을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 시상식 무사히 끝마치라고 눈을 못 감으셨나 봅니더. 
 
[엠스플 야구인] 아버지는 ‘최동원상’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강진수는 야구인이 아니다. 그가 야구를 통해 득 본 것도 없다. 하지만, 야구는 강진수 덕에 많은 걸 얻었다. 그가 없었다면 야구팬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최동원 동상도, 권위 있는 상으로 발전하는 ‘최동원상’도, 무료로 운영되는 ‘최동원 야구교실’도, 최동원을 추억하는 이들도 지금처럼 많지 않을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강진수는 조문객들을 맞으면서 이 말을 빼놓지 않았다. 식사는 하셨는교? 밥 묵고 가소. 고맙십니더.
 
야구계가 정말 고마워해야할 건 강진수다. 이제 야구계가 그에게 “밥은 묵고 다니나”는 안부를 물어줄 차례다.
 
박찬웅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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