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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규의 농구 in] 한기범 : 나의 재능을 타인의 희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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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 (화) 11:00

                           

[조원규의 농구 in] 한기범 : 나의 재능을 타인의 희망으로



[점프볼=조원규 칼럼니스트] 1988년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했을 때, 우리 팀은 영등포지구 장애인 센터를 찾았다. 승리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사인볼을 주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모두가 떠날 시간, 한기범만 보이지 않았다. 그가 늦은 이유는 장애인 한 사람의 손을 잡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 『키다리아저씨 한기범의 희망 콘서트』 中

 

승리의 1쿼터 ? 고공농구의 시대를 열다

한국 농구 역사에서 한기범의 이름은 중요합니다. 잘 달리고 손끝의 감각도 예민한 205cm의 장신은 한기범이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초반, 김유택과 고공농구의 시대를 열었고, 고려대와 연세대가 양분하고 있던 대학농구에 대형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중앙대 시대를 열었습니다. 중앙대에 이어 신생 기아자동차도 왕좌로 이끌었죠.

 

한기범이 처음 선택한 종목은 배구였습니다. 배구선수 출신의 아버지로부터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배구는, 아니 당시 한기범이 속했던 배구부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후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농구부에 뽑혔습니다. 그리고 소년체전 충남 대표에도 뽑혔습니다. 역시 키가 컸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는 소년체전에 참가한 모든 농구선수들 중에 가장 키가 컸습니다.

 

[조원규의 농구 in] 한기범 : 나의 재능을 타인의 희망으로 

“11월부터 6월까지 장기 합숙을 했어요. 여관과 체육관만 왔다 갔다 했죠. 그런데 체육관에 난방을 안 해줘요. 그해 겨울이 20년 만의 한파라고 했는데…. 가장 힘든 것은 새벽에 보문산 정상까지 달리기입니다. 너무 추웠어요. 그런데 달리기가 늦다고 선생님이 때려요. 키는 멀대 같이 큰데 근육이 받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맞았죠. 늦는다고 맞고, 못한다고 맞고,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맞고….”

 

키만 컸던 한기범은 소년체전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농구는 신장이 재능이기 때문입니다. 한기범은 모든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그에게 농구는 추운 겨울에 난방 없는 체육관이었고, 맞으면서 뛰는 보문산이었습니다. 몸이 기억하는 고통스런 감각들이 강하게 농구의 길을 거부했습니다.

 

[조원규의 농구 in] 한기범 : 나의 재능을 타인의 희망으로 

“어느 날 낮선 남자 세 분이 찾아오셨어요. 그 중 한 분이 명지중학교 코치였습니다. 서울 말투를 쓰는데 목소리가 너무 좋았어요. 미성이라고 하죠.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넘어갔습니다(웃음). 서울은 훈련을 과학적으로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결과적으로 웃기는 소리였어요. 서울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몸이 기억하는 언어는 서울의 부드러운 말투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서울로 온 한기범은 일대일 훈련을 받으면서 기본기들을 습득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농구가 좋아지기 시작했고, 자신감도 붙기 시작했습니다. 3년 만에 팀의 주전이 되었습니다. 남상만과 유재학의 경복고에 막혀 우승은 못했지만, 청소년대표로 태극마크도 달았습니다. 1년을 유급해서 고등학교 2학년 때였고 당시 신장이 이미 205cm였습니다.

 

농구선수 한기범이 추억하는 가장 빛나는 시기는 중앙대 시절입니다. 1년 후배 김유택이 합류하며 타 대학을 압도하는 높이를 구축했고, 그 해 5관왕에 올랐습니다. 이후에 더블포스트를 지휘할 허재와 강동희까지 합류하면서 중앙대는 왕조를 구축했습니다. 80년대 초반과 중반, 중앙대는 누구나 인정하는 대학농구 최고의 팀이었습니다.

 

“김유택과 허재 모두 승부욕이 대단했어요. 훈련을 할 때면 서로를 의식하면서 치열하게 몸싸움을 했죠. 저와 김유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대일에서 지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훈련하고 다른 팀과 경기 하면 너무 편했습니다. 다른 팀에는 김유택과 허재가 없었거든요.”

 

대학 졸업 이후도 비교적 순탄했습니다. 한기범을 비롯한 중앙대 왕조의 주축 선수들은 모두 기아자동차에 입단했습니다. 여기에 유재학, 정덕화 등 연세대 출신 선수들도 합류했습니다. 한기범은 중앙대에 이어 기아에서도 왕조의 개국공신이 됐습니다. 1983년부터 국가대표로 뛰면서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도 경험했습니다. 본인의 말처럼 선수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시련의 2쿼터 ? 사업 실패와 마르판증후군

은퇴 이후도 순조로웠습니다. 구로고등학교 코치를 거쳐 모교인 중앙대 코치로 지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방송도 한기범을 찾았습니다. 탤런트 김태희와 시트콤을 같이 데뷔했고, 2002년에는 SBS 시트콤에 고정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개그 프로그램에도 다수 출연했죠.

 

“서장훈이 방송 출연하는 모습을 보면 좋아요. 농구 인기가 떨어지고 저변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농구선수가 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좋죠. 자연스럽게 농구에 대한 얘기들도 하고요. 나도 말을 잘하고 재밌게 했으면 오래 할 수 있었는데(웃음), 그나마 내가 방송으로 진출할 길을 열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만 해도 다가올 불행을 예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지도자 생활이 짧았을 뿐, 방송인과 사업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햄버거 브랜드와 과자 브랜드의 CF를 찍기도 했죠. 사업도 외형적으로는 좋았습니다. 키 크는 식품을 런칭해서 10개월 만에 6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출 규모를 판단하지 못해 정작 수입은 적었습니다. 월 6억 원의 매출에서 사무실을 유지할 정도의 수익만 남았다고 하네요. 돈을 많이 번다는 소문에 여기저기서 접근해온 사람들도 스트레스였습니다. 결국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후의 사업은 계속 실패했습니다.

 

사업 실패보다 더 큰 시련은 병(病)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심장병은 유전이라는 말을 들어서 온 가족이 모두 검사를 했죠. 병원에서는 ‘괜찮다.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었어요. 동생을 보내고 바로 병원에 갔습니다. 대동맥이 조금씩 커지다 풍선처럼 터져 죽는 희귀병이라며 수술을 권유했습니다. 당장 오늘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한기범의 병은 마르판증후군으로 대동맥의 확장이 심해지면 균열과 파열이 일어나면서 사망에 이르는 선천성 질환입니다. 아버지가 그 병으로 돌아가셨고 동생도 같은 병으로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의사는 수술을 권유했고, 그 날 입원을 했습니다. 다행히 결과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8년 후, 2008년에 다시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2008년에는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수술비가 없었습니다.

 

“한국심장재단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대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천하의 한기범이 돈이 없어서 빚을 졌구나. 동생한테 빚을 졌는데 세상에도 빚을 졌구나. 수술 후에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빚을 갚아야할지 고민했습니다. 그것이 나눔을 하게 된 계기입니다. 지인들과 상의했는데 모두 좋다고 했어요.”

 

동생의 죽음은 한기범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동생의 죽음이 아니었으면 다시 병원을 찾지 않았을테니까요. 두 번째 수술은 한기범의 사회적 생명을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나의 재능을 타인의 희망으로 바꾸는 삶. 두 번의 대수술은 불안감이었고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의 수술이 한기범에게 준 것은 작지 않았습니다. 자연인 한기범의 육체적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고, 사회인 한기범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깊이 고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원규의 농구 in] 한기범 : 나의 재능을 타인의 희망으로 

행복한 3쿼터 ? 나의 재능을 타인의 희망으로

500만원의 수술비가 없어서 자선단체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빚을 갚고 싶은데, 돈으로 갚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언제’보다 ‘어떻게’로 사고를 전환한 것이죠. 먼저 한기범희망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사단법인 재단이 아닌 비영리 임의단체로 시작했습니다. 이후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때로는 잡상인이나 사기꾼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안병용 의정부 시장을 소개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중앙대 선배였습니다. 축구는 자선경기를 하는데 농구는 못하냐고 물으시더라고요.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획을 해야 하는데 주변에 기획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돈을 아끼려고 제가 직접 기획을 했습니다. 행사 종료시간이 예정보다 3시간을 초과했어요. 김유택, 문경은, 정덕화, 유도훈 등 후배들을 잔뜩 불러서 했는데, 귀한 시간 뺏어서 많이 미안했죠.”

 

2011년 5월 5일. 한국 프로농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왕년의 농구 스타들이 의정부체육관에 대거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기범과 현역 시절 동료로 뛰었던 허재, 강동희를 비롯해 정덕화, 유도훈, 문경은, 김영만, 조동기, 전희철 등 현역시절 이름을 날렸던 스타들이 지나간 세월을 탓하며 경기를 뛰었습니다. 심장병 어린이 환자와 다문화 어린이, 농구 꿈나무들을 돕기 위해 한기범희망재단이 개최한 ‘2011 희망농구 올스타전’입니다.

 

2011년을 시작으로 ‘희망농구’는 11번을 더 개최했습니다. 올해 10월 3일에는 의정부체육관에서 제13회 희망농구가 열립니다. 개그맨농구팀 더홀(사랑팀)과 레인보우스타즈 연예인농구팀(희망팀)이 참가해 자선경기를 합니다. 보건복지부,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대한체육회, 대한민국농구협회, 의정부시가 후원으로 참여합니다. 타이거JK, 비지, 주노플로, SV-치어리딩사관학교, 엔젤킹은 공연으로 참여합니다. 1회와 비교해 참여의 폭이 많이 넓어졌습니다.

 

“나눔의 선배들이 말했습니다. 나눔은 최고의 가치고, 최고의 행복이고 기쁨이라고…. 그 마음을 여전히 알아가고 있어요. 나눔은 가진 사람이 주는 것입니다. 나는 농구라는 재능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농구로 나눔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건강하고, 어떤 사람은 악기를 잘 다룹니다. 희망농구는 그런 사람들이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하고 있는 최고의 팀이에요.”

 

나눔은 가진 사람만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나눌 수 있는 재능이 있습니다. 자원봉사로 참여해 행사물품을 옮기는 작은 힘도 재능입니다. 관람객을 안내하는 친절한 웃음도 재능입니다. 사진을 찍어 본인의 SNS에 올리는 것도 재능입니다. 소액이라도 후원할 수 있는 마음과 재력도 재능입니다. 이런 재능들이 자발적으로 모일 때 나눔은 가장 아름답습니다.

 

나눔은 시혜가 아닙니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누군가 어려울 때 내가 도움이 되는 순환입니다. 한기범은 그 아름다운 순환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갚음의 시간’입니다. 동생에게 또 사회에게 생명을 빚졌기 때문입니다. ‘갚음의 시간’동안 그는 희망을 모았고, 더 많은 행복을 설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조원규의 농구 in] 한기범 : 나의 재능을 타인의 희망으로 

희망의 4쿼터 ? 농구가 희망이 되기를

작년 가을, 대한민국은 어금니 아빠 이영학으로 인해 경악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기부에 대한 불신과 기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기부문화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연말연시에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마을,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돕는 방식의 확산입니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기부대상자들에 대한 투명한 공개’와 맞물리는 부분입니다. 한기범희망재단은 어떨까요?

 

“돈 좀 후원해주세요는 한계가 있습니다. 후원으로 하는 시대는 지났어요. 사업으로 재원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법인이 나눔 법인 투명도에서 5위입니다. 그래도 정기후원은 계속 줄고 있어요. 그래서 공모사업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재단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재원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한기범희망나눔 홈페이지의 결산보고에 의하면 2013년 세입은 약 4억 원입니다. 그 중 후원금은 152,485,018원. 작년 세입은 2013년과 비교해 두 배에 가까운 금액입니다. 그런데 후원금은 오히려 줄었습니다. 다행히 목적사원 후원과 보조금 수입이 늘면서 세입은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정기 후원이 줄어드는 것은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2년간 준비한 사업들이 있습니다. 「한기범의 재미있는 농구」 출간을 준비중이구요, 농구 패턴을 배울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농구대잔치 시절부터의 자료와 코칭 자료를 모은 funbasketball.co.kr도 런칭을 준비하고 있어요. 생활체육지도자를 대상으로 책으로, 영상으로, 애니메이션으로 농구를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거죠. 동영상 편집, 홈페이지 제작을 배우면서 직접 다 만들었습니다. 이 사업이 재정에 큰 도움이 되길 기대하고 있어요.”

 

한기범의 선결 과제는 법인의 경제적 안정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해외봉사입니다. 과거에 ‘도전! 지구탐험대’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문화현장과 숨겨진 오지를 찾아다니며 다양한 도전과 모험을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한기범은 이 프로그램에 다섯 번을 출연했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낙후한 나라들을 갔는데, 그들에게 농구를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네요. 본인 때문에 고생한 아내의 손을 꼭 붙잡고 말이죠.

 

“예전에, 장모님이 ‘자넨 받을 줄만 알고 베풀 줄은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생각해보니 그랬습니다. 선수 시절에 팬들로부터 참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줄 알았습니다. 그것을 누리기만 했습니다. 지금 선수들도 저와 비슷한 것 같아요. 팬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사회로 환원하는 것을 잘 못합니다.”

 

한기범의 또 다른 희망은 보다 많은 농구인이 나눔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본인은 농구를 빛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폭력, 도박 등 안 좋은 뉴스를 접하면 힘이 빠진다고 합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시스템입니다. 기술과 지식, 인성을 함께 교육받지 못한 과거의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승부를 떠나 농구를 즐길 수 있는 대회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농구가 더 즐거운 뉴스로 팬들과 만나기를 원하고, 그것은 농구인 한기범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보너스 원샷 | 못다 한 이야기

Q. 이제 건강은 이상이 없나요?

일 년에 정기적으로 두 번을 병원에 가야 합니다. 불안하지는 않아요. 제가 받은 수술은 인공판막이 아니고 환자 본인의 판막을 사용해서 부작용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아직도 아프냐고 물어보는 것이 가장 큰 부작용이에요.(웃음)

 

Q. 유전이면 자녀들도 걱정이 되겠네요.

제가 5남매입니다. 형과 막내만 괜찮고, 여동생도 수술을 받았어요. 자식이 아들만 둘인데 걱정은 되죠. 둘 다 키가 185cm 정도 되는데 둘째가 말라서…. 이 병이 키가 크고 마른 사람에게 잘 나타나거든요. 그래도 이제는 병명을 알았고 꾸준히 검진을 받고 있어서 크게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Q. 농구인 2세가 많습니다. 아들들에게 농구를 시킬 생각은 없으셨나요?

시키려고 했는데 큰 아들은 농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둘째는 시켰는데 노력을 안 하고. 둘 다 농구는 좋아합니다.(웃음)

 

+ 저자 소개 +

점프볼 칼럼니스트 조원규는 ‘농구잡담’ 블로그를 운영하는 행사기획 전문가다. 2017년 12월호부터 ‘조원규의 시원한 籠談’, ‘조원규의 농구in’ 등을 통해 다양한 농구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진_문복주, 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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