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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한의 골든크로스] ‘윌 크라이?’ ‘한국판 디그롬?’ 옅어지는 승리의 가치

일병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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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8 (월) 08:22

                           
승리는 투수를 평가하는 가장 클래식한 지표다. 승리의 특성상 잘 던지고도 울 수 있는 게 선발 투수의 운명이다. 하지만, 세이버메트릭스 개념 도입 뒤 현대 야구에서 승리의 가치는 점점 옅어지는 분위기다. 승리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마운드 운영이 탄생할 수 있을까.
 
[김근한의 골든크로스] ‘윌 크라이?’ ‘한국판 디그롬?’ 옅어지는 승리의 가치

 
[엠스플뉴스]
 
투수의 승리 기록은 팀의 승리와 직결되는 묘한 숫자다. 분명히 팀 승리에 이바지했기에 승리 투수가 되지만, 오히려 팀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도 승리 투수가 될 수 있다. 선발 투수에겐 잘 던지고도 운다는 뜻이 통한다.
 
선발 투수에게 승리는 자신의 실력을 100% 보여주지 못하는 기록이다. 9이닝 무실점을 하더라도 팀 득점이 없다면 패전 투수가 될 수 있다. 설사 팀 득점이 나더라도 4.2이닝 무실점에 그치면 승리 투수가 될 수 없다. 승리가 많으면 좋은 투수일 확률이 높은 건 맞지만, 좋은 투수라면 무조건 승리가 많다는 명제는 성립되지 않는다.
 
세이버메트릭스 개념 도입 이후 현대 야구에서 투수의 승리에 대한 가치가 옅어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도 아직 승리 투수와 관련한 얘기는 쏟아져 나온다. 소위 말하는 ‘스토리’가 되는 까닭이다.
 
“승리는 많은 운이 따라줘야 하는 기록이다.”
 
[김근한의 골든크로스] ‘윌 크라이?’ ‘한국판 디그롬?’ 옅어지는 승리의 가치

 
올 시즌 LG 트윈스 선발 투수 헨리 소사(9승 9패 평균자책 3.52)와 타일러 윌슨(9승 4패 평균자책 3.07)은 리그 수준급 투구를 보여줬음에도 두 자릿수 승수 달성이 어려워졌다. 올 시즌 정규이닝을 소화한 평균자책 3점대 이하 투수들 가운데 소사와 윌슨만이 10승에 도달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윌슨에겐 ‘윌 크라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최근 현역 은퇴를 선언한 LG 투수 봉중근도 팀 입단 초기에 선발 투수로서 ‘봉 크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뛰어난 투구에도 팀 야수진이나 불펜진이 승리를 만들어내지 못한 까닭이다.
 
봉중근은 ‘봉 크라이’라는 별명은 열심히 던졌는데 승운이 없다는 거다. 지금 보면 윌슨도 마찬가지다. 야구를 하다 보면 분명히 그런 시기는 온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며 승리 기록은 운이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승운 때문에 한 투수가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셈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승운에 운 대표적인 투수가 있었다. 바로 뉴욕 메츠 투수 제이콥 디그롬이다. 디그롬은 올 시즌 32경기(217이닝)에 등판해 10승 9패 평균자책 1.70 269탈삼진을 기록했다. 경기당 평균 3.53득점의 저조한 득점 지원을 받은 디그롬은 24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와 리그 최저 평균자책이라는 뛰어난 실력에도 가까스로 10승을 달성했다.
 
올 시즌 25경기에 등판해 평균자책 2.95 WHIP 1.12라는 뛰어난 성적에도 시즌 10승 8패에 머무른 SK 와이번스 투수 김광현이 “디그롬도 있는데 나는 괜찮다. 득점 지원이 좋은 날도, 안 좋은 날도 있는 법”이라고 말할 정도다.
 
가장 많이 실점하는 1회, KBO리그에도 ‘오프너’가 도입될까
 
[김근한의 골든크로스] ‘윌 크라이?’ ‘한국판 디그롬?’ 옅어지는 승리의 가치

 
물론 과거보다 승리 투수의 가치가 옅어지는 건 사실이다. ‘10승’과 ‘20승’이라는 상징적인 숫자가 있지만, 야구팬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단순한 ‘클래식’ 기록으로만 그 선수의 모든 걸 판단하지 않는다. 사실 야구의 특성상 팀 승리와 직결되는 승리 기록을 줘야 할 주인공은 경기 당일 결승타를 친 타자다. 그렇다고 결승타를 많이 친 타자에게 주는 특별한 상은 없다.
 
또 선발 투수가 승리를 얻으려면 5이닝을 무조건 채워야 한다. 5회 전 팀이 앞서는 상황에서 선발 투수가 강판당하면 이후 승리를 지킨 투수들 가운데 기록원이 자의적으로 승리 투수를 판정한다. 당연히 선발 투수의 승리 기록을 위해 경기 양상이 달라진다. 팀이 앞선 상황에서 5회 등판한 선발 투수의 위기를 바라보며 결단을 할 벤치의 마음은 타들어 간다. 선발 투수의 승리를 지켜주려다 경기가 뒤집히는 사례는 적지 않다.
 
한 현장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재밌는 가정을 언급했다. 만약 투수의 승리 기록이 없다면 어떤 경기 양상이 펼쳐질까요? 만약 승리 기록이 없다면 선발 투수는 ‘5이닝’이라는 숫자 제한에서 벗어난다. 또 벤치는 더 효율적인 투수 활용을 고민해야 한다. 보직의 경계선이 더 모호해질 수 있다.
 
[김근한의 골든크로스] ‘윌 크라이?’ ‘한국판 디그롬?’ 옅어지는 승리의 가치

 
10월 8일 기준으로 올 시즌 KBO리그 경기 이닝 가운데 가장 높은 평균자책을 기록한 시점은 바로 1회다. 올 시즌 1회 리그 전체 평균자책은 5.65, WHIP는 1.55다. 그다음으로 평균자책이 높은 이닝은 3회(5.63)였다. 오히려 1회부터 짧은 이닝을 최소 실점으로 막아줄 강력한 구위를 지닌 투수를 먼저 올린 뒤 다음부터 이닝을 길게 소화해줄 투수를 올리는 게 승리 확률을 높일 수도 있다. 선취 득점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더 그렇다.
 
잘 던지고도 울어야 하는 장면이 구시대 야구가 될까
 
[김근한의 골든크로스] ‘윌 크라이?’ ‘한국판 디그롬?’ 옅어지는 승리의 가치

 
올 시즌 탬파베이 레이스가 보여준 오프너가 대표적인 사례다. 타자가 투수의 공에 익숙해지는 시점인 타순이 한 바퀴 돌기 전에 투수가 가장 효과적인 투구를 펼친다는 점을 고려해 선발 투수가 짧게 던지고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게 ‘오프너’ 전략이다. MLB 네트워크 스포츠 캐스터 브라이언 케니가 기존의 ‘스타터(선발 투수)’와 다르다는 의미로 ‘오프너’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더 유명해졌다.
 
로테이션이 제대로 돌아가는 선발진을 구축했다면 굳이 ‘오프너’를 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모든 팀이 완벽한 선발 로테이션을 돌릴 순 없다. 팀 전력 구성상 가장 효율적인 승리 전략을 짜야 할 때도 있다.
 
한 구단 코치는 “솔직히 5회라도 승리를 위해 벤치에서 선발 투수를 내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승리 투수가 걸려있기에 선수의 자존심을 생각 안 할 수 없다. 만약 승리 투수가 없다면 훨씬 다양한 형태의 투수 기용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바라봤다.
 
물론 오랜 역사를 지닌 클래식 기록인 투수의 승리가 당장 사라질 일은 없다. 여전히 연봉 고과 평가에도 승리 기록이 중요하게 들어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선발 투수가 승리 요건을 갖추고 마운드에서 내려간 뒤 더그아웃에서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는 장면 역시 계속 나올 것이다.
 
분명한 건 야구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단 점이다. KBO리그에서 선발·불펜·마무리로 이어지는 분업화가 이뤄진 지도 불과 20여 년 정도다. 유행은 돌고 돈다. 언젠간 선발 투수 예고가 의미 없어질 수 있다. 투수를 소개할 때 승리 기록이 가장 앞에 오지 않는 미래도 가능하다. 투수가 잘 던지고도 울어야 하는 장면 역시 ‘구시대 야구’로 취급받을 날이 오지 않을까.
 
김근한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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