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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인 NBA] 케빈 가넷, 늑대군단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영원한 늑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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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0 (수) 08:31

                           

[줌 인 NBA] 케빈 가넷, 늑대군단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영원한 늑대대장!



[점프볼=양준민 기자] 혹자는 그를 일컬어 NBA 최고의 트래쉬 토커 중 한 명이라 평가한다. 하지만 반대로 팀원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동료이자 뛰어난 리더. 실제로 그와 함께 선수생활을 했던 브라이언 스칼리비리니는 “팀 동료로서는 정말 최고의 선수”라는 말을 남겼고 그를 지도했던 닥 리버스 감독도 “매년 팀에 들어오는 선수들을 이보다 잘 챙기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바로 늑대군단,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영원한 늑대대장, 케빈 가넷(41, 211cm)의 이야기다.


 


커리어 평균 17.8득점(FG 49.7%) 10리바운드 3.7어시스트라는 숫자를 기록지에 남겼을 정도로 가넷은 빅맨이지만 다재다능했다. 또, 데뷔 때부터 코트를 떠나는 그날까지 뜨거운 열정과 승부욕도 함께 드러냈다. 그 예로 가넷은 자유투 반칙이 나왔을 때 상대방이 연습으로 던지는 슛조차도 블록으로 쳐낼 정도였다. 반대로 때로는 이 같은 승부욕들이 변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트래쉬 토크들로 변질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평소 가넷을 존경했던 조아킴 노아(NYK)는 집에 있던 가넷의 브로마이드를 찢어버릴 정도였고 가넷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으로 가넷의 등번호, 21번을 거꾸로 해 12번을 등번호로 선택한 드와이트 하워드(CHA)도 가넷에 대한 인간적인 실망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케빈 가넷 정규리그 커리어 평균 기록


정규리그 1,462경기 평균 34.5분 출장 17.8득점 10리바운드 3.7어시스트 1.3스틸 1.4블록 2.2턴오버 FG 49.7% FT 78.9%(평균 4.2개 시도)


 


하지만 그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초·중반까지 팀 던컨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 리그를 이끌어간 대표적인 스타이자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난 파워포워드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가넷이 열정의 승부사였다면 반대로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던컨은 냉철한 승부사의 모습을 보여주며 라이벌 구도를 이어갔다. 우연의 일치는 몰라도 두 선수는 2015-2016시즌을 끝으로 동시에 코트를 떠났다. 당시 NBA는 던컨, 가넷과 함께 코비 브라이언트까지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 이는 NBA에 또 다른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상징성을 가지는 사건이기도 했다.


[줌 인 NBA] 케빈 가넷, 늑대군단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영원한 늑대대장!



▲미네소타와 가넷의 만남, 미네소타 전설의 시작을 알리다!


 


가넷과 미네소타의 첫 만남은 1995년이었다. 몰딘 고등학교 시절, 주 MVP에 뽑히는 등 농구에 두각을 나타냈던 가넷은 고등학교 3학년, 백인 학생들과 흑인 학생들의 패싸움에 휘말렸고 종종 백인 학생들에게 인종차별을 당하는 등 힘겨운 시간들을 보냈다. 이에 그의 어머니, 셜리 가넷은 아들을 시카고에 위치한 페러것 고등학교로 전학 보냈다. 가넷은 페러것 고등학교에서 뛰며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고 전미 고교농구 올스타전격인 McDonald's All-American Game에서 맹활약, 전국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결국, 자신의 기량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게 된 가넷은 1995 NBA 드래프트에 참가신청서를 제출, 대학으로 진학하던 다른 선수들과 달리 곧장 NBA 무대로 향했다.(*당시의 싸움은 패싸움이 아니라 백인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흑인 학생들을 폭행했다는 의견들도 있다)


 


가넷은 워크아웃에서 엄청난 운동능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팀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딱 한 팀뿐이었다. 미네소타의 단장을 맡고 있던 케빈 맥헤일은 가넷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반면, 다른 29개 팀들은 가넷의 운동능력은 인정하지만 파워포워드를 맡기엔 파워가 부족하고 그렇다고 스몰포워드로 뛰기엔 활동범위가 좁다는 점을 이유로 가넷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 성인농구에 관한 경험이 전혀 없다는 점이 NBA 팀들의 외면을 받은 가장 큰 이유였다.(*가넷은 1975년 이후 처음으로 고등학교 졸업 직후 프로에 직행한 선수가 됐고 드래프트에 지명되지 않았다면 메릴랜드 대학으로 진학할 예정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드래프트에서 미네소타가 전체 5순위로 가넷을 지명했을 때, 美 현지에선 “저렇게 삐쩍 마른 선수를 대체 어디에다 쓸 것인가”는 말로 미네소타의 선택을 맹비난했다. 하지만 맥헤일은 “사람들의 선택은 틀렸다. 가넷은 분명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가 될 것이다. 모든 이들이 분명 이날의 선택을 후회할 것이다”는 말로 응수하며 가넷에게 힘을 실어줬다. 맥헤일은 가넷의 운동능력, 기동성과 함께 무궁무진한 성장가능성을 보고 그를 지명할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해서 가넷이 데뷔 시즌 시작부터 꽃길만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네소타의 감독직을 맡고 있던 빌 블레어는 가넷을 중용하지 않았다. 또, 팀의 터줏대감이던 크리스천 레이트너와 톰 구글리오타를 넘어서기에는 가넷의 기량이 현저히 떨어졌다. 블레어 감독은 세 사람을 모두 살리기 위해 가넷을 주전 센터로 기용하기도 했지만 그 시너지효과는 미비했다. 설상가상으로 가넷을 살뜰히 챙겼던 구글리오타와는 달리 레이트너는 가넷을 견제, 가넷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공개적으로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시즌 중반 팀을 재편하는 상황에서 레이트너는 애틀랜타 호크스로 트레이드됐고 미네소타는 구글리오타와 가넷, 두 명의 빅맨 체제를 공고히 했다.


 


동시에 맥헤일 감독은 성적부진을 이유로 블레어 감독의 해임을 결정, 플립 숀더스를 그 자리에 앉혔다. 절친한 사이였던 맥헤일과 숀더스는 좋은 호흡을 보였고 숀더스 감독은 주전 파워포워드로 가넷을 중용하기 시작, 가넷을 집중적으로 조련하는 등 가넷의 성장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시즌 초반 가넷은 기본기 부족으로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주전 파워포워드로 자리 잡은 이후 가넷은 평균 14득점 8리바운드를 기록, 데뷔 시즌 80경기에서 평균 28.7분 출장 10.4득점(FG 49.1%) 6.3리바운드 1.8어시스트라는 숫자를 남겼다. 시즌 종료 후에는 NBA 올-루키 세컨드 팀에 선정되는 등 비교적 준수한 신고식을 치렀다.


 


1996 NBA 신인드래프트에서 스테판 마버리를 지명한 미네소타는 마버리-가넷-구글리오타를 중심으로 팀을 꾸려나갔다. 구글리오타는 당시 81경기에서 평균 20.1득점(FG 44.2%) 8.7리바운드 4.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최전성기를 달렸다. 마찬가지로 가넷도 성장세를 보이며 평균 17득점(FG 49.9%) 8리바운드 3.1어시스트를 기록, 미네소타는 마버리-가넷-구글리오타, 세 사람의 활약에 힘입어 창단 후 처음으로 40승을 돌파함과 동시에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강력한 우승후보로 평가받던 휴스턴 로켓츠를 만나 3전 전패로 탈락했다. 가넷 본인은 1996-1997시즌 처음으로 NBA 올스타전 무대를 밟는 등 빠르게 팀의 미래이자 중심으로 발돋움했다.


 


가넷은 1997-1998시즌에도 82경기에서 평균 18.5득점(FG 49.1%) 9.6리바운드 4.2어시스트를 기록, 팀을 2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무대로 이끌었다. 1998 NBA 올스타전에서 선발로 출장, 미네소타의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로 NBA 올스타전에 선발 출장한 미네소타의 선수에 그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다음 시즌인 1998-1999시즌에는 47경기에서 평균 20.8득점(FG 46%) 10.4리바운드 4.3어시스트를 기록, 데뷔 후 처음으로 20득점을 돌파한 가넷은 2007-2008시즌을 앞두고 미네소타를 떠나기 전까지 9시즌 연속으로 평균 +20득점&10리바운드&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중 1999-2000시즌부터 2004-2005시즌까지는 6시즌 연속으로 평균 +20득점&10리바운드&5어시스트를 기록, 이는 NBA 역사상 가넷과 함께 래리 버드, 단 두 사람밖에 이루지 못한 대기록이다.


 


가넷의 성장에 힘입어 미네소타도 정규리그에서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하지만 반대로 플레이오프만 가면 한없이 작아졌다. 가넷과 미네소타는 매번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심지어 시리즈에서 2승 달성조차도 미네소타에게는 어려운 과제였다. 특히, 가넷은 1999-2000시즌 데뷔 후 처음으로 NBA 올-퍼스트 팀에 선정, 미네소타도 50승 32패를 기록하며 최고의 성적을 냈지만 1라운드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져스에 패해 아쉬움을 남겼다. 가넷과 미네소타는 1996-1997시즌부터 2002-2003시즌까지 7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라이벌 던컨이 좋은 감독과 동료들을 만나 승승장구하던 것과는 달리 미네소타 시절의 가넷은 홀로 고군분투를 이어갔다.


 


무엇보다 스몰마켓인 미네소타는 가넷의 높은 연봉을 감당하기에도 벅차 현실적으로 가넷의 조력자를 영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미네소타는 97년 여름, 가넷에게 6년간 1억 2,6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숫자를 안겼지만 결과적으로 팀의 발전에는 오히려 해가 됐다. 이 과정에서 구글리오타는 가넷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팀의 태도에 실망, 앞으로 미네소타에선 자신의 자리가 점점 줄어들 것이라 느낀 탓인지 1998년 여름, 미네소타를 떠나 피닉스 선즈로 둥지를 옮겼다. 평소 팀 운영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마버리도 1999-2000시즌 개막을 앞두고 가족들과 좀 더 가까이 있고 싶다는 이유로 공식적으로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 뉴저지 네츠, 현재의 브루클린 네츠로 둥지를 옮겼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 9월, 미네소타와 조 스미스의 부정 계약서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미네소타는 향후 5년간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 박탈과 함께 350만 달러의 벌금을 물게 됐다. 스미스는 1999년 1월, 미네소타와 1년 단기 계약을 맺고 플레이오프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미네소타는 스미스의 높은 연봉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이에 1년짜리 계약을 세 시즌동안 쪼개서 체결한 뒤 네 번째 계약에서 고액의 장기 계약을 맺는다는 내용의 이면 계약서를 작성했다. 미네소타와 스미스는 한 팀에서 3년 이상을 보내면 팀 샐러리캡에 상관없이 고액 연봉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래리 버드 조항을 이용하려 했지만 스미스의 에이전트가 이 사실을 폭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NBA 사무국은 미네소타와 스미스의 이전 계약을 모두 무효로 처리했고 스미스는 선수자격이 박탈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네소타는 계속해 팀 전력을 보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결국 2003-2004시즌을 앞두고 대대적인 트레이드를 통해 샘 카셀과 라트렐 스프리웰을 영입, 그토록 염원하던 가넷의 조력자 영입에 성공했다. 든든한 조력자를 얻은 가넷은 2003-2004시즌 82경기에서 평균 24.2득점(FG 49.9%) 13.9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 정규리그 MVP 수상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가넷은 2003-2004시즌 당시, 4번의 이주의 선수상, 4번의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2년 연속으로 NBA-올 퍼스트 팀에 선정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팀 동료인 카셀도 2003-2004시즌 81경기에서 평균 19.8득점(FG 48.8%) 3.3리바운드 7.3어시스트를 기록, 정규리그 MVP 최종 투표 10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가넷-카셀-스프리웰, 삼각편대의 활약에 힘입어 미네소타도 정규리그 58승 24패를 기록, 서부 컨퍼런스 1번 시드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전과 달리 덴버 너게츠, 새크라멘토 킹스를 완파하고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했다. 가넷은 플레이오프 18경기에서 평균 24.3득점(FG 45.2%) 14.6리바운드 5.1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초인적인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카셀이 엉덩이 부상으로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미네소타는 당시, 전당포가 이끄는 LA 레이커스에게 서부 컨퍼런스 왕좌를 내줘야했다.(*2003-2004시즌 레이커스의 전당포 라인업은 코비 브라이언트-샤킬 오닐-칼 말론-개리 페이튼으로 구성됐다)


 


다만, 더욱 아쉬웠던 건 미네소타의 삼각편대가 결성된 지 단 두 시즌 만에 해체됐다는 점이었다. 카셀과 스프리웰, 두 선수가 연봉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겪으며 태업성 플레이들로 팀 분위기를 망쳤기 때문. 카셀의 경우는 부상으로 59경기 출장에 그쳤다. 미네소타는 2004-2005시즌도 44승 38패를 기록했지만 아쉽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팀 분위기가 망가질 만큼 망가진 후라는 점이었다. 결국, 미네소타는 2004-2005시즌 종료 후 카셀, 스프리웰과의 이별을 결정, 가넷은 또 다시 늑대군단의 외로운 늑대대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넷도 이 과정에서 숀더스 감독이 경질되는 것을 지켜보는 등 많은 상처들을 받았고 급기야 2007-2008시즌 개막을 앞두고는 미네소타와의 이별을 결심하게 된다.(*당시, 일부 팬들은 가넷은 그저 스텟 쌓기에만 열중하는 선수라 비난하며 가넷에게 큰 상처를 줬다)


[줌 인 NBA] 케빈 가넷, 늑대군단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영원한 늑대대장!



▲보스턴 셀틱스 전격 이적, 생애 첫 우승반지를 손에 끼다!


 


실제로 2007년 여름, FA시장의 화두는 단연 가넷의 차기 행선지였다. 앞서 언급했듯 이미 구단을 향한 충성심이 사라진 가넷은 팀을 옮기기로 마음을 먹었고 미네소타도 가넷의 트레이드를 통해 변화를 모색했다. 당시 가넷의 영입을 위해 보스턴 셀틱스를 포함해 시카고 불스, LA 레이커스,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 등 다수의 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당초, 보스턴이 가넷의 영입에 선두주자로 나섰지만 정작 가넷 본인이 보스턴으로 가기를 꺼려하면서 트레이드가 쉽게 성사되지 못했다. 가넷은 “만약, 나를 보스턴으로 보낸다면 옵션을 통해 다시 시장으로 나오겠다” 협박성 멘트를 날리기도 했지만 보스턴이 레이 알렌을 영입, 전력을 재정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결국, 보스턴의 우승가능성이 높아진 것을 보고 가넷은 보스턴의 유니폼을 입기로 결정, 미네소타는 가넷을 보내는 대신 알 제퍼슨, 라이언 곰스, 세바스찬 텔페어, 제럴드 그린, 테오 레틀리프, 5명의 선수와 함께 현금과 더불어 2장의 신인드래프트 지명권을 받아왔다. 제퍼슨의 경우, 트레이드 직후 인터뷰에서 “보스턴을 떠난 것은 아쉽지만 가넷과 같은 대선수와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제퍼슨은 가넷이 떠난 자리를 대신해 새로운 늑대군단의 대장으로 취임, 2007-2008시즌 82경기에서 평균 21득점(FG 50%) 11.1리바운드 1.4어시스트를 기록했다.(*제퍼슨은 2007년부터 2010년까지 미네소타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반대로 보스턴은 가넷과 알렌의 합류로 레이 알렌-폴 피어스-케빈 가넷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빅3 라인업을 완성했다. 다만, 전성기를 지나 서서히 기량이 내려오는 시점에서 세 사람이 뭉친 거라 이들을 향한 우려의 목소리도 곳곳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결성 첫해인 2007-2008시즌, 우승을 달성, 사람들의 우려가 틀렸음을 증명했다. 보스턴은 빅3의 활약과 함께 라존 론도(NOP)가 두각을 나타내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해졌다. 여기에 더해 인사이드에선 켄드릭 퍼킨스, 글렌 데이비스, 리온 포우 등 젊은 선수들의 격렬한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으며 수비와 리바운드 등 궂은일에서 제몫을 다해주면서 빅3를 보좌했다. 가넷도 첫 시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스턴의 시스템에 빠르게 적응하는 등 2007-2008시즌 정규리그 MVP 투표에서 최종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보스턴은 시즌 초반 다소 주춤했다. 하지만 빅3의 손발이 점점 맞아 들어가면서 정규리그 66승 16패를 기록, 동부 컨퍼런스 1번 시드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전 시즌인 2006-2007시즌 꼴찌를 기록하며 자존심을 구겼던 보스턴은 단 한 시즌 만에 부활에 성공했던 것. 보스턴은 정규리그에서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수비와 함께 유기적인 볼 움직임을 가져가며 동부 컨퍼런스를 재패했다. 이는 빅3가 개인의 이기심이 아닌 이타적인 마인드를 내세우며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2007-2008시즌 보스턴은 평균 22.4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다만, 정규리그에서의 승승장구와 달리 플레이오프에선 고전이 이어졌다. 보스턴은 1라운드 애틀랜타 호크스전부터 2라운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전까지, 모두 7차전에 가서야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었다. 동부를 넘어 파이널로 가는 길도 쉽지가 않았다. 2003-2004시즌을 기점으로 동부 컨퍼런스의 강호로 군림하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만난 보스턴은 4차전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보스턴은 리차드 해밀턴과 천시 빌럽스의 백코트 듀오를 막지 못했다. 두 선수는 평균 38.5득점을 합작, 팀 공격을 이끌었다. 하지만 5차전과 6차전, 인사이드를 완벽히 장악한 가넷의 활약에 힘입어 보스턴은 디트로이트를 넘고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다.(*가넷은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마지막 2경기에서 평균 24.5득점(FG 54.5%) 6.5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생애 처음으로 밟은 파이널 무대에서도 가넷의 맹활약은 이어졌다. 가넷과 보스턴의 파이널 상대도 코비 브라이언트가 이끄는 전통 라이벌, LA 레이커스라 그 의미가 더 컸다. 특히, 브라이언트는 오닐과 결별한 후 정규리그 MVP 수상과 함께 자신의 손으로 팀을 파이널에 올려놓으며 홀로 서기에 성공, 이 때문에 두 팀의 파이널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다만, 파이널은 생각보다 보스턴에게 유리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가넷은 파이널 6경기에서 평균 18.2득점(FG 42.9%) 13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 보스턴의 빅3는 파이널에서 평균 60.3득점을 합작했다. 빅3의 활약에 힘입어 보스턴은 내리 첫 2경기를 잡으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후 계속해 공방전을 이어갔지만 가넷이 파이널 6차전에서 26득점(FG 55.6%) 14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 레이커스의 빅맨들을 압도하며 팀의 17번째 우승이자 본인의 생애 첫 우승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지었다. 가넷뿐만 아니라 피어스와 알렌에게도 첫 우승이었다.


 


가넷은 경기 종료 후 그간의 감정이 복받친 탓인지 기쁨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인터뷰에서 “Anything is possible”이라는 말로 팬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또, “오늘의 우승은 순전히 나 개인의 힘이 아닌 팀이 하나로 뭉쳤기에 이룰 수 있었던 결과물이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2007-2008시즌 파이널 MVP의 영광은 피어스에게로 돌아갔다. 당시, “파이널 MVP는 가넷이 타야했다”는 의견들이 주를 이룬 터라 가넷의 수상불발은 더욱 아쉬움을 더했다. 그러나 정작 가넷 본인은 파이널 MVP 수상 불발에 대한 아쉬움 하나 없이 진정으로 우승의 기쁨을 즐기는 모습이었다.(*피어스는 2007-2008시즌 파이널 6경기에서 평균 21.8득점(FG 43.2%) 4.5리바운드 6.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보스턴에서의 가넷은 미네소타 시절과 달리 공격은 피어스와 알렌의 원투펀치에게 맡기고 본인은 수비에 더 치중했다. 가넷도 포스트업과 함께 페이스업에도 능할 정도로 내·외곽을 넘나드는 득점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보스턴에선 승리를 위해 공격이 아닌 수비로 팀에 기여했다. 미네소타 시절부터 NBA 올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5번이나 선정될 정도로 수비력이 좋은 가넷은 본인의 긴 팔과 빠른 풋워크와 스피드를 통해 보스턴의 수비범위를 확장, 가로수비망을 탄탄하게 만들었다. 압박수비를 통해 2대2플레이에서도 상대에게 공간을 내주지 않았다. 가넷은 2007-2008시즌 평균 1.4개의 스틸을 기록했다.(*가넷은 21시즌 동안 총9번의 NBA 올 디펜시브 퍼스트 팀, 3번의 NBA 올 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선정됐다) 


 


마찬가지로 세로수비에서도 운동능력과 긴 팔을 이용해 상대팀으로 하여금 쉽게 림을 공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수비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난 가넷은 수비상황 시 선수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지적하는 등 사실상 보스턴의 수비의 처음이자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가넷은 2007-2008시즌, 생애 처음으로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가넷의 활약에 힘입어 보스턴도 2007-2008시즌 평균 90.2실점을 기록, 이는 전 시즌보다 무려 9점이나 낮아진 수치였다. 현재는 미네소타의 감독으로 재직 중이지만 당시보스턴의 수비전담코치로 재직했던 탐 티보듀 감독의 수비전술이 코트에서 빛날 수 있었던 것도 가넷이 수비에서 중심을 잘 잡아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비만큼이나 공격에서도 가넷의 존재감은 컸다. 깡마른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가넷의 탄탄한 스크린은 팀에 공격전개에 많은 기여를 했다. 가넷은 활발한 움직임을 통한 스크린으로 팀의 공간 활용을 도왔다. 특히, 론도가 리그 정상급 포인트가드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가넷과 플레이하면서 2대2플레이에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 론도가 “보스턴 시절, 가넷과 플레이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 그 증거다. 또, 패스능력이 좋은 가넷은 컷인이나 백도어 컷으로 들어가는 선수들에게 양질의 패스들을 전달하기도 했다. 미네소타 시절, 포인트가드의 부재로 종종 포인트가드를 맡았던 것이 가넷이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 


 


여기에 더해 페이스업이나 포스트업을 통해 스스로 득점사냥에도 나섰다. 중거리슛이 정확한 가넷은 점프슛으로 많은 득점들을 성공, 상대팀 센터들이 밖으로 나오게 만들며 공간을 창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가넷은 탁월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젊은 선수들을 잘 다독이며 팀을 이끌었다. 경기 중에도 득점이나 수비를 성공시킨 후 과격한 세레머니들로 팀 사기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평소 조용히 팀을 이끌던 피어스가 엄마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면 열정적이고 화끈한 성격의 가넷은 칭찬과 당근을 적절히 섞어가며 팀을 이끌었다. 그러다보니 가넷은 상대적으로 피어스보다 많은 주목을 받으며 실질적인 보스턴의 리더로 발돋움했다.


 


2007-2008시즌, 그토록 원하던 우승을 이뤄낸 가넷은 2008-2009시즌에도 2연패를 향해 순조로운 출발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른쪽 무릎에 이상이 생기면서 결국에는 플레이오프 무대도 밟지 못하고 수술대에 올랐다. 보스턴은 가넷이 빠졌음에도 알렌, 피어스의 건재와 함께 론도의 급성장으로 62승 20패를 기록, 동부 컨퍼런스 2번 시드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 하지만 지난 시즌에 이어 플레이오프에선 고전을 면치 못했다. 1라운드, 데릭 로즈가 이끄는 시카고 불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치르며 체력을 소비했다. 올랜도 매직을 만난 2라운드도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드와이트 하워드를 막지 못하며 패배, 시즌을 마쳐야했다. 보스턴으로선 가넷의 공백이 무척이나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가넷은 2008-2009시즌 57경기 평균 15.8득점(FG 53.1%) 8.5리바운드 2.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무릎 관절경 수술을 마치고 가넷은 2009-2010시즌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정규리그 69경기에서 평균 29.9분 출장 14.3득점(FG 52.1%) 7.3리바운드 2.7어시스트를 기록, 팀을 동부 컨퍼런스 4번 시드로 이끌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클리블랜드, 마이애미, 올랜도를 연파하고 파이널에 진출, 레이커스와 격돌해 한때 시리즈를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뒷심이 부족해 준우승에 만족해야했다. 보스턴은 빅3와 론도가 평균 61.5득점을 합작했지만 코비를 막지 못하며 우승반지를 차지하지 못했다. 코비는 파이널에서 평균 28.6득점(FG 40.5%) 8리바운드 3.9어시스트를 기록, 2연패 달성과 함께 2년 연속으로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다만,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어느덧 서른 중반의 나이를 향해가던 가넷의 기량은 서서히 노쇠화가 시작됐다. 가넷뿐만 아니라 피어스와 알렌의 기량도 조금씩 떨어졌다. 반면, 론도의 기량은 계속해 급성장, 어느새 보스턴은 빅3의 팀이 아닌 론도의 팀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가넷의 경우 스피드가 떨어지면서 파워포워드가 아닌 센터로 보직을 옮기기까지 했다. 알렌은 론도와의 불화설이 대두되는 등 2012-2013시즌을 앞두고 보스턴을 떠나 마이애미로 이적했다. 무엇보다 보스턴으로선 가넷과 피어스 등 팀 내 고참 선수들의 높은 몸값이 부담이었다. 이들의 높은 몸값은 보스턴의 발목을 잡았다. 이 때문에 외부 FA영입이 쉽지 않아 결과적으로 팀 리빌딩이 늦어지는 결과를 초래, 빅3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줌 인 NBA] 케빈 가넷, 늑대군단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영원한 늑대대장!



▲미네소타의 늑대대장, 미네소타의 영원한 전설로 아로새겨지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대니 에인지, 보스턴 단장은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평소 냉철한 판단력과 결단을 내리면 냉혹할 정도로 과격한 일처리로 정평이 난 에인지 단장은 빅3의 해체라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넷과 함께 팀의 상징과도 같았던 피어스도 함께 둥지를 옮기게 된다. 2012-2013시즌을 앞두고 보스턴은 가넷과 피어스, 그리고 존 테리(MIL)를 브루클린 네츠로 보내며 샐러리캡을 줄였고 동시에 다수의 신인드래프트 지명권을 얻어오면서 팀 리빌딩의 초석을 다졌다.(*당시, 보스턴은 신인드래프트 지명권 3장과 함께 크리스 험프리스, 제럴드 월리스, 키스 보건스, 레지 에번스 4명의 선수도 함께 받아왔다)


 


가넷은 브루클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자신의 前 동료, 말릭 실리를 추억하기 위해 등번호를 2번으로 선택, 재기의 의지를 다졌지만 이는 쉽지가 않았다. 무릎부상 등 잔부상이 가넷의 발목을 잡았고 브루클린 이적 첫해 54경기에서 평균 20.5분 출장 6.5득점(FG 44.1%) 6.6리바운드 1.5어시스트를 기록, 데뷔 후 최악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2014-2015시즌도 마찬가지였다. 부상을 털고 몸 상태는 전보다 좋아졌지만 노쇠화는 계속됐다. 당시, 가넷은 자신의 커리어가 막바지로 향하고 있음을 예견한 탓인지 미네소타로의 복귀의지를 종종 밝히기도 했다. 이에 브루클린은 미네소타와 가넷의 트레이드를 논의하기 시작, 결국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가넷은 8년 만에 미네소타의 푸른색 유니폼을 다시 입게 됐다. 숀더스 감독이 미네소타로 복귀한 것이 가넷이 미네소타에서 마지막을 보내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였다.(*브루클린은 가넷을 미네소타로 보내고 테디어스 영을 데려왔다)


 


브루클린으로선 가넷의 이적으로 샐러리캡을 절감했고 반대로 미네소타는 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선수의 복귀라는 상징성과 함께 확실한 라커룸 리더를 얻게 됐다. 실제로 미네소타는 가넷의 복귀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미네소타 구단 측은 가넷의 소개에 앞서 전성기 시절, 가넷의 영상을 편집해 상영, 레전드의 귀환을 축하했다. 영상이 나올 때 타겟 센터를 찾은 미네소타의 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영상이 끝났을 때는 격한 박수와 환호성으로 가넷을 반겼다. 가넷은 이날 선발 출장해 5득점 8리바운드 2어시스트 2블록을 기록했다. 미네소타는 워싱턴 위저즈에 20점차 완승을 거두며 가넷의 복귀전을 축하했다. 가넷도 팬들의 성원에 보답, 경기가 끝난 후 팬들에게 다음 홈경기 티켓 1,000장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명, 이날 가넷의 복귀를 진심으로 반긴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저글리 보이’였다. 2003년 홈경기에서 가슴에는 늑대, 팔뚝에는 가넷을 뜻하는 KG를 쓰고 열정적인 춤사위를 보여줬던 저글리 보이는 당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웃통을 벗었던 괴이한 행동이 문제가 되면서 보안요원들에 의해 경기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12년이 지난 후, 저글리 보이는 가넷의 홈 복귀전에 모습을 드러냈고 미네소타는 전반이 끝난 후 댄스타임 때 저글리 보이를 비췄다. 


 


하지만 저글리 보이는 기대와 달리 춤추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의 두 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계속해 저글리 보이가 나서주기를 원했고 결국 저글리보이는 자리를 박차고 춤을 추기 시작, 당시와 같은 열정적인 춤사위와 퍼포먼스로 가넷의 복귀를 환영했다. 저글리 보이는 가슴에 “WELCOME HOME, KG”라는 문구로 가넷을 환영했고 이에 가넷도 저글리 보이의 춤에 리스펙트의 손짓으로 화답했다.(*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이는 이미 미네소타 구단 측과 저글리 보이 사이에 협의가 됐던 퍼포먼스였다)


[줌 인 NBA] 케빈 가넷, 늑대군단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영원한 늑대대장!



미네소타로 복귀했지만 가넷은 여전히 부상악령에 발목이 잡히며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가넷은 미네소타로 돌아온 두 시즌, 총 43경기 출장에 그쳤다. 하지만 가넷의 가치는 코트 안보다는 밖에서 더 빛났다. 가넷은 칼-앤써니 타운스, 앤드류 위긴스, 잭 라빈 등 젊은 선수들의 멘토를 자처, 비록 경기를 뛰지는 못했지만 코트 밖에서 이들의 성장세를 보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리버스, LA 클리퍼스 감독도 “가넷이 요즘 미네소타 젊은 선수들의 매력에 푹 빠졌다. 나와 만나면 항상 가넷은 그들을 칭찬하기 바쁘다. 가넷 스스로도 어린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는 게 무척이나 즐겁다고 말했다. 요즘 가넷은 정말 어린선수들을 가르치는 것을 즐기고 있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당초, 가넷은 계약의 마지막 해인 2016-2017시즌까지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2016-2017시즌을 앞두고 “후배들과 함께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나의 몸 상태를 이를 허락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남기더니 결국 2016년 9월 23일, 바이아웃을 통해 미네소타와의 계약해지를 결정, 공식적으로 선수은퇴를 선언하며 21년간의 정든 코트를 떠났다. 은퇴 후 가넷은 선수시절부터 호평을 받은 입담을 살려 방송활동은 물론, 코칭 컨설턴트를 맡으며 후배들의 성장을 돕고 있다. 그중 직속후배인 타운스는 여전히 가넷과 교류를 이어가며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넷은 농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선수였다. 때로는 과도한 승부욕이 거친 입담과 비매너적인 플레이로 변질되며 선수 말년엔 수많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또, 팀의 패배에 누구보다 슬퍼하고 반대로 팀의 승리에 누구보다 기뻐하는 선수도 바로 가넷이었다. 더불어 팀을 하나로 모으는 능력도 탁월했다. 가넷이 있는 팀들은 그 어느 팀보다 끈끈한 팀워크를 자랑할 정도로 가넷은 리더로서 자질이 뛰어난 선수였다. 뿐만 아니라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항상 구름 관중을 몰고 다녔고 이 때문에 ‘Big Ticket’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가넷의 은퇴를 두고 라빈은 “가넷이 우리 모두에게 무서운 사람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는 은퇴 후 명예의 전당 입성이 확실한 선수다. 모든 사람이 그와 함께 뛰고 싶어 했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무척이나 즐거웠다”라는 말로 가넷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라빈의 말처럼 가넷은 향후 명예의 전당이 입성이 확실한 선수다. 이처럼 이제는 리그의 살아있는 전설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미네소타의 전설로 변신한 가넷의 제2의 삶은 앞으로 어떤 모습들로 사람들에게 기억될지 그의 삶을 응원하며 길고 길었던 이 글을 마치려한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점프볼 DB, 아디다스, NBA 미디어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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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일병 프프프잉

삉삉

2017.12.20 09:09:56

쥰나 까맣네옇

이등병 스타붙자

2017.12.20 09:10:15

케빈가넷 멋잇다

병장 광주송교창

2017.12.20 09:10:55

케빈 가넷 대단했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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