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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스플 기획] 연고지 기반 신인 1차지명…“회장님, 고향 탓해야 합니까?”

일병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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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7 (수) 11:22

                           
| 6월 25일 공개 행사로 성황리에 열린 2019 KBO 신인 1차 지명회의. 하지만 이날 회의에선 ‘1차 지명 제도를 없애자’는 구단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1차 지명 공개 행사에서 1차 지명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역설적인 사정을 엠스플뉴스가 취재했다. 
 
[엠스플 기획] 연고지 기반 신인 1차지명…“회장님, 고향 탓해야 합니까?”

 
[엠스플뉴스]
 
“KBO리그의 동반성장을 위해 지명제도 개선을 희망합니다.”
 
6월 25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2019 KBO(한국야구위원회) 신인 1차 지명회의'. 이날 1차 지명 선수를 발표하러 단상에 나온 NC 다이노스 김종문 단장대행의 첫 마디는 ‘신인 지명제도 개선’ 요구였다. 
 
공개 행사로 진행된 이날 1차 지명회의는 야구팬과 언론의 큰 관심 속에 성황리에 끝났다. 하지만 참가한 모든 구단이 이날 행사를 웃으면서 즐기진 못했다. 올해도 1차 연고지 우선 지명 선수를 놓고 구단별로 극심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1차 지명은 그해 신인드래프트에서 구단이 가장 먼저 행사하는 지명권이다. 바로 1군 투입 가능한 즉시전력감 유망주를 뽑을 수 있어야 1차 지명을 하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서울과 광주, 부산 등 몇몇 대도시 연고팀을 제외한 나머지 구단들은 해마다 마땅한 1차 지명감 선수가 없어서 쓰린 속을 달래는 게 현실이다. NC 김 단장대행이 총대를 메고 공개적으로 ‘지명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나선 이유다.
 
“1차 지명 제도를 하루빨리 폐지하고 전면 드래프트로 가야 합니다. 스포츠라면 당연히 공정한 게임이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1차 지명은 공정한 게임이 아닌 ‘불공정 게임’을 하게 만드는 제도잖아요.” NC 구단 스카우트의 말이다.  
 
우리 팀만을 생각해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구단 같은 경우 내년도 연고지에 대어급 유망주가 나올 예정이라 계속 1차 지명을 해도 아쉬울 건 없어요. 하지만 프로야구가 1천만 관중을 돌파하고, 한 단계 더 발전하려면 전면 드래프트 도입을 통해 전력평준화를 이뤄야 한다는 게 소신입니다.“ 다른 지방구단 스카우트 책임자의 주장이다.  
 
1차 지명, ‘전력평준화’ 아닌 ‘지역주의’ 목적으로 생겼다
 
[엠스플 기획] 연고지 기반 신인 1차지명…“회장님, 고향 탓해야 합니까?”

 
‘전력 평준화’는 프로스포츠에서 드래프트 제도를 시행하는 근본 이유다. 메이저리그(MLB)를 최고의 호황으로 이끈 버드 셀릭 전 MLB 커미셔너는 리그 운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상시적인 경쟁 구조의 구축이라며 그 밑바탕을 만드는 게 드래프트 제도라고 했다. 
 
드래프트 제도가 생기기 전까지 MLB는 신인 선수 영입을 각 구단의 자율에 맡겼다. 그 결과 좋은 유망주가 돈 많은 구단으로 쏠리는 문제가 발생했고, 신인 계약금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구단들의 부담이 커졌다. 
 
이에 MLB는 1965년부터 신인 드래프트를 도입해 전년도 최하위팀부터 역순으로 가장 좋은 선수를 먼저 지명할 기회를 줬다. 드래프트 제도 도입으로 하위권 팀과 상위권 팀의 전력차를 줄이고, 전력평준화로 매시즌 치열한 순위 싸움으로 유도하고, 치열한 경쟁이 흥미를 유발해 더 많은 관중을 야구장으로 이끄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KBO리그의 드래프트 제도는 탄생부터 ‘1차 우선지명’이란 기형적 형태로 운영돼 왔다. 1차 지명 제도에선 하위권 팀에게 좋은 선수를 먼저 데려갈 기회를 주지 않는다. 각 구단이 연고지역에서 가장 좋은 선수를 선점해 데려간 뒤, 비로소 남은 선수들을 대상으로 ‘드래프트’를 하는 방식이다. 미국과 일본은 물론 프로스포츠가 존재하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 ‘한국식’ 드래프트 방식이다.
 
왜 이런 제도를 채택했을까. 초창기 프로야구가 ‘지역감정’을 흥행 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원로 야구기자 홍순일 선생은 “이용일 초대 KBO 사무총장은 야구가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로 성장한 원동력이 모교애, 향토애에 있다고 봤다”며 프로야구가 흥행하려면 향토애, 즉 지역 감정을 적극적으로 자극해야 한다고 확신했고, 프로야구 창단 계획 때부터 지역 연고제를 염두에 뒀다고 밝혔다. 
 
지역 출신 선수가 고스란히 지역 연고 구단에 입단하는 ‘1차 지명제도’ 역시 이런 지역주의를 바탕으로 탄생했다. 초창기 1차 지명은 지금처럼 팀당 1명씩이 아닌 ‘무제한’으로 지역 선수를 지명하는 방식이었다. 1번 타자부터 9번 타자까지, 선발투수부터 마무리까지 선수단 전원이 같은 지역 출신으로 채워졌다. 
 
롯데 자이언츠 팬은 부산·경남 출신 선수들로만 가득한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고, 삼성 라이온즈 팬은 대구·경북 지역 출신으로만 채워진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했다. 해태 타이거즈는 광주·호남 출신만 가득했고, 삼미 슈퍼스타즈엔 인천 출신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삼미, 빙그레, 쌍방울... 1차 지명 제도의 피해자들
 
[엠스플 기획] 연고지 기반 신인 1차지명…“회장님, 고향 탓해야 합니까?”

 
지역주의 덕분에 초창기 프로야구 흥행이 성공을 거뒀을지 모르나, 드래프트 제도의 본래 목적인 ‘전력 평준화’와는 동떨어진 결과를 낳았다. 
 
가장 큰 피해자는 연고지에서 이렇다할 우수 선수가 나오지 않은 ‘삼청태(삼미-청보-태평양)’ 프랜차이즈였다. 이 프랜차이즈는 14시즌 동안 1,589경기에서 632승, 승률 0.377를 기록하며 만년 꼴찌를 면치 못했다. 또 빙그레 이글스, 쌍방울 레이더스 등 나중에 리그에 참가한 신생 구단들도 1차 지명 제도와 척박한 ‘팜’ 탓에 전력 보강에 어려움을 겪었다.
 
만약 KBO리그가 정상적인 드래프트 제도를 시행하는 리그였다면, '1983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년도 꼴찌 삼미 슈퍼스타즈는 최동원, 김시진 같은 대어급 투수를 잡을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1986드래프트'에서도 신생팀 빙그레가 ‘국보급 투수’ 선동열을 차지했을지 모른다. '1990 드래프트' 때 신생팀 쌍방울의 선택은 김동수나 임형석, 김경기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가장 최근엔 10구단 KT 위즈가 1차 지명 제도의 피해자로 떠올랐다. KBO는 넥센 히어로즈와 NC 등 후발주자들의 등장에 발맞춰 2010년부터 한동안 1차 지명 대신 전면드래프트를 시행했지만, 기존 구단들의 반발에 결국 2014 드래프트부터 다시 1차 지명 방식으로 돌아가는 ‘개악’을 단행했다.
 
1차 지명은 신생팀과 전력이 약한 팀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제도다. KT 연고지인 수원과 경기 지역은 서울이나 대도시 지역에 비해 고교 야구부 저변이 약하고, 우수 선수가 나올 가능성도 희박한 편이다. 또 신생구단이 창단 이후 한동안 최하위권을 맴도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전면드래프트로 제일 좋은 유망주를 확보해야 빠르게 전력을 보강해 하위권을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 구단들이 10구단 창단 승인과 함께 1차 지명을 부활시키면서, KT는 신인 드래프트를 통한 전력 보강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됐다. KT는 2016시즌 2년 연속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지만, 그해 열린 신인드래프트에서 고우석이나 윤성빈이 아닌 장안고 출신 조병욱을 지명해야 했다. 지난해엔 유신고 우완 김 민을 지명해 그나마 웃을 수 있었지만, 이런 행운이 해마다 찾아올 가능성은 크지 않다. 
 
반면 1차 지명 제도로 엄청난 수혜를 입은 구단들도 있다. 1980년대 고교야구 최강 호남 팜을 자랑한 해태다. 해태는 ‘스타 군단’의 위용을 뽐내며 1997년까지 무려 9번이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까지 강력했던 대구·경북 팜을 손에 넣은 삼성도 1982년부터 1993년까지 12시즌 동안 754승으로 같은 기간 해태(747승)를 제치고 최다승을 거뒀다. 
 
물론 구단의 적극적인 지원, 뛰어난 감독의 존재, 선수단의 단합, 승부근성도 해태와 삼성이 강팀으로 군림하는 데 큰 기여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팀이 최강 전력을 뽐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해마다 유망주가 굴러 들어오는 좋은 연고지를 차지한 덕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노력과 실력이 아닌, 운과 우연이 구단 운명을 좌우하는 ‘한국식’ 제도
 
[엠스플 기획] 연고지 기반 신인 1차지명…“회장님, 고향 탓해야 합니까?”

 
전면드래프트 도입을 주장하는 한 구단 관계자는 1차 지명 제도가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탄생해 오랫동안 유지된 탓인지,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제도인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만약 미국야구에 1차 지명 같은 제도가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라고 물었다. 
 
그랬다면 아마도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 우승팀은 뉴욕 양키스가 아닌 LA 다저스나 LA 에인절스가 됐을지 모른다. 두 구단이 속한 캘리포니아주가 역대 2,246명으로 가장 많은 메이저리거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많은 1,422명의 메이저리거를 배출한 펜실베이니아주 소속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운명도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지방구단 관계자는 서울이나 대도시 연고 구단이나, 그외 구단이나 다 똑같은 KBO 회원사인데 어느 팀은 연고지 때문에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다른 팀은 연고지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건 불합리하다고 목소릴 높였다. 
 
서울과 대도시 구단들이 좋은 연고지를 차지한 게 다른 구단보다 더 노력해서도 아니고, KBO에 더 많은 기여를 해서도 아니잖아요. 그냥 원래부터 그 연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뿐이죠. 이미 좋은 연고지를 차지한 덕분에 더 많은 관중과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더해 최우수 신인을 차지하는 혜택까지 주어진다는 건, 불공평한 일 아닐까요.“ 이 관계자의 말이다. 
 
[엠스플 기획] 연고지 기반 신인 1차지명…“회장님, 고향 탓해야 합니까?”

 
아마 서울과 대도시 구단들은 '지금의 연고지가 그저 고스톱 쳐서 거저 얻은 게 아니'라고 외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프로야구 탄생 당시 구단별 연고지 배정이 이뤄진 기준을 보면 구단의 노력이나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모기업 총수의 ‘고향’이 연고지 배정의 최우선 기준이었다.
 
원로야구기자 홍순일 선생은 “원래 프로야구에 참여할 기업은 12개 업체 정도로,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대기업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참여시킬 순 없었다. 재무구조가 튼튼하고 종업원 수가 3만명을 넘어도 기업체 총수가 연고지 출신이든지 아니면 기업의 연고성이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실제 서울 연고의 OB 베어스는 두산 박용곤 회장의 출생지가 서울이라 연고권이 인정됐고, 충청도의 빙그레 이글스도 한화 김승연 회장의 고향이 '천안'이란 점이 작용했다. 삼성은 그룹의 창업 발상지가 '대구'란 이유로 대구와 경북을 차지했고, 롯데도 신격호 회장이 경남 양산 출신이라 부산과 경남을 연고지로 얻었다. 
 
그룹 총수가 태어난 지역에 따라 구단의 연고지가 결정되고, 그렇게 정해진 연고지가 '1차 지명'이란 기형적 제도를 통해 향후 수십년간 구단의 운명을 갈랐다. 구단의 노력과 실력이 아닌, 운과 우연과 운명이 구단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근대적 시스템. 37년 묵은 신인 1차 지명이 프로야구에서 없어져야 할 ‘적폐’인 이유다. 
 
배지헌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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