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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농구선수, 그 후…국가대표에서 교육자로 변신한 이선영 씨

일병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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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목) 16:44

                           

[매거진] 농구선수, 그 후…국가대표에서 교육자로 변신한 이선영 씨



[점프볼=조원규 칼럼니스트] 점프볼에 메일이 왔습니다. 전 국가대표 여자농구 선수의 생애사(生涯史)를 연구한 논문 소개와 취재 요청이었습니다. 엘리트 선수들은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은퇴의 수순을 밟아야 합니다. 은퇴 이후에는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은퇴 이후의 사회 적응과 진로 선택이 쉽지 않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운동에만 전념해야 하는 환경에서 운동 외의 다른 역량을 키우기 쉽지 않고, 인간관계도 제한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으로 은퇴를 미리 준비하는 경우는 그래도 낫습니다. 부상 등의 이유로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갑자기 은퇴를 결정하는 경우는 진로선택이 더욱 어렵습니다. 논문의 화자였던 이선영이 그랬습니다. 부상으로 인해 25살의 어린 나이에 은퇴를 했고, 이후 전업주부의 삶을 살았습니다. IMF를 겪으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지만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선영은 대학 진학을 선택했습니다. 자격증이라도 취득하기 위함입니다. 입시 준비기간의 단축을 위해 2년제 전문대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대학 공부가 의욕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시련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그녀는 성장했고, 대학 입학 후 15년이 지난 지금의 그녀는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인천대학교에서 이선영을 만나 국가대표 농구선수에서 전업주부로, 이후 교육자로 전환하는 과정을 취재했습니다.





 





[매거진] 농구선수, 그 후…국가대표에서 교육자로 변신한 이선영 씨





 





옥천의 보리가마





 





이선영은 옥천여고를 졸업하고 1987년부터 한국화장품에서 뛰었습니다. 177cm의 신장에 포지션은 센터 겸 파워포워드. 힘이 좋고 전후반 40분을 뛰어도 지치는 기색이 없어서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은 ‘보리가마’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포지션 대비 작은 신장에 스피드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한 언론에서는 “굼뜬데다가 센터로서 키도 작아 크게 빛을 못 봤던 이선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구력도 짧았습니다. 농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 중학교 1학년. 당시 농구부를 급조했던 학교는 키 큰 학생들 중에 선수를 선발했습니다. 이선영은 그 중의 한 명으로 농구를 시작했고, 중3때 소년체전 평가전에서 첫 공식경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충북여중과의 경기였습니다.





 





“당시 제 역할은 상대 에이스를 막는, 일명 수비수였어요. 그 선수가 평소보다 절반밖에 득점을 못했습니다. 그 경기를 본 고등학교 선생님이 끌어주셨고 많이 가르쳐주셨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는 3년 내내 경기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1년 선배 중에 엘리트 출신이 없었고, 동기 2명은 입학금을 못 내서 팀 합류가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경기 경험을 쌓으며 공격 비중이 늘어났습니다. 고2 말부터 팀의 성적도 좋아졌습니다. 옥천으로 한국화장품이 연습경기를 왔고, 그 경기로 인해 이선영의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진로는 결정됐습니다.





 





“3학년 올라가는 시점에 연습경기를 했어요. (당시 한국화정품의 감독과 코치였던) 김평옥, 황유하 선생님이 경기를 보시고 체육선생님께 저를 달라고 말씀하셨나 봐요. 아버지께는 선영이가 태극마크를 달 수 있고, 올림픽도 뛸 수 있다고 설득하셨다고 하더라고요. 태극마크는 달았는데 경기는 거의 뛰지 못했습니다. 유영주, 정은순 등 경쟁자들의 실력이 너무 출중했어요(웃음).”





 





[매거진] 농구선수, 그 후…국가대표에서 교육자로 변신한 이선영 씨[매거진] 농구선수, 그 후…국가대표에서 교육자로 변신한 이선영 씨 





 





영광과 시련





 





이선영의 입단 당시 한국화장품에는 205cm의 장신센터 김영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7년 김영희가 시력 이상으로 쓰러진 후 말단비대증 진단까지 받으며 은퇴를 결정합니다. 김영희 은퇴 이후 한국화장품에 180cm대 선수는 박기례가 유일했습니다.





 





“김영희 선수가 있어서 키 큰 선수를 뽑지 않았나 봐요. 다른 실업팀들과 비교하면 제 포지션에서 제가 제일 키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팀에서는 작지 않았어요.”





 





이선영은 힘과 체력에서 강점이 있는 반면 신장에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슈팅 폼의 개조. 타점을 높이기 위해서 머리 위에서 원핸드 슛을 던졌고, 블록슛을 피하기 위해 훅슛을 개발했습니다. 슛거리도 늘렸습니다. 감각을 키우기 위해 체육관 조명을 끄고 슛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땀의 결과는 정직합니다.





 





90년 농구대잔치 현대전에서 이선영은  41득점을 기록합니다. 이전 경기에서는 24득점을 기록했는데, 상대가 성정아-정은순 트윈타워의 삼성생명입니다. 삼성생명은 국민은행과 함께 당시 최강을 다투는 팀이었고, 트윈타워는 국가대표 주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상적인 활약에 힘입어 이선영은 운동선수의 꿈인 태극마크도 달았습니다.





 





그런데 선수로서의 첫 전성기가 마지막 전성기였습니다. 원인은 부상입니다. 미끄러운 체육관 바닥이 문제였습니다. 방향전환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전방 십자인대와 외측부 인대 파열. 당시에는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충분한 치료와 휴식 없이 훈련과 경기를 강행하면서 부상 부위는 더욱 악화됐습니다.





 





“처음 부상은 완전파열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부분파열이었는데 재활이 잘못되고 기간도 짧아서 결국 나중에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연습을 하는 중간에도 무릎이 돌아가고 통증이 굉장히 심했어요. 감독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역정을 내셨고…. 주무 언니가 선영이가 남자를 사귀고 있어서 다이어트 하는 것 같다고 애기하면서 오해가 커졌습니다.”





 





주무 언니의 말은 호의였습니다. 그러나 이선영의 이탈이 팀 성적에 영향을 줬고, 팀 성적의 하락은 서로 예민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이선영이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서 불편함도 늘어났습니다. 그 시간들이 반복되며 이선영은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은퇴는 삶의 전부였던 농구코트와의 완전한 이별을 의미했습니다. 부상으로 인한 실망에 그 마음을 보듬어주지 못하는 팀에 대한 실망까지 더해져 은퇴 후 오랜 기간 농구장 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93년도에 은퇴했습니다. 결혼상대로 사귄 것은 아니었는데, 오래 사귀다 보니까 팀에서는 오해를 했던 것 같아요. 4년을 만났지만 정작 만나는 횟수는 많지 않았어요. 훈련과 합숙으로 만날 수가 없었어요.”





 





[매거진] 농구선수, 그 후…국가대표에서 교육자로 변신한 이선영 씨 





 





새로운 도전





 





은퇴하고 이선영은 4년을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키우는 전업주부의 삶을 살았습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IMF가 없었다면, 그 결과로 평생직장의 개념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전업주부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IMF 이후로 계속 불안감이 있었어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공부를 하겠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남편은 태어나고 100일이 안 되서 아버님을 잃었어요. 어머님이 고생하면서 키우셨죠. 그래서 남편도 항상 불안감이 있었나 봐요. 혹시 내가 잘못됐을 때 남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 그런 걱정이 남편의 내면 깊숙이 있어서 공부에 찬성했던 것 같아요.”





 





30대 중반의 10년차 전업주부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 뒤늦은 대학 진학을 결정했습니다.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특별전형을 알게 되고, 특별전형을 통해 2004년 명지전문대학 사회체육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학업에만 전념할 수 없었습니다. 선수 시절 부상을 입었던 부위는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나빠졌고, 두 아이의 육아 역시 고민이었습니다.





 





가장 큰 난관은 공부가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릎보조기에 의존하는 다리로 인해 실기가 안 되고, 전공 용어는 낮선 외국어처럼 머리 안에 아주 잠시 머물다 떠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7년을 농구선수와 전업주부로 살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부족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봐주셨지만, 육아의 모든 것을 의지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선영은 선수 시절 익숙했던 반복 훈련을 선택했습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테이프에 녹음한 후 운전하면서 녹음한 테이프를 반복하여 들었습니다. 그렇게 용어에 익숙해졌고, 머리 안에 머무는 시간도 길어졌습니다. 익숙함은 자신감을 키웠습니다. 학과 수업을 따라가기도 힘겨웠던 그녀가 방학 때는 자격증에 도전했고 운동처방사를 시작으로 웨이트트레이닝, 수영 등의 자격증을 차례로 취득했습니다.





 





2004년에 명지전문대에 입학한 그녀는 2006년 2월에 학교를 졸업했고, 6개월 후에는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자격증이 학점으로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평생교육원에서 6개월 수업을 더 받은 그녀는 학사 학위 취득과 함께 대학원 입학을 결정했고, 동시에 생활체육지도자 생활도 시작했습니다.





 





“대학원 지도교수님의 1호 제자가 명지지전문대에서 강의를 하셨어요. 저와 동갑인데, 저를 예쁘게 보셨나 봐요(웃음). 석사를 들어가면 대학 강단에서 농구 수업도 할 수 있는데 이왕 시작했으니 거기까지 가보라고 권유하셨죠. 음…. 대학 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성적 장학금도 받았죠. 그런데 그 생활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너무 힘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못하겠다고 했는데 선생님이 많은 조언을 해주셨죠. 더 큰 역할들을 할 수 있는데 중간에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이 특히 와 닿았어요.”





 





대학원 공부와 지도자 생활의 병행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이선영에게 남은 것은 창피함이었습니다. 머리에 든 것이 없어서 석사를 받았다고 얘기하는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박사 과정은 시작부터 달랐습니다. 직장생활을 중단했습니다. 랩실에 들어가서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종일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랩실에 들어가는 것을 남편과 상의했는데 흔쾌히 허락해 줬어요. 석사 공부를 시작하고 시어머니가 살림도 도와주셨죠. ‘중간에 포기할 줄 알았는데 너 참 대단하더라. 지금부터 내가 도와줄 테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힘을 주셨어요. 그래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엄마의 마음





 





2011년부터 이선영은 인천대학교의 행정조교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안정된 직장이라는 점을 고려했습니다. 지도자 생활 등 다른 경력들이 호봉으로 인정돼 급여 수준이 낮지 않다고 합니다. 정년이 보장되는 정규직에 퇴직 후 공무원에 준하는 연금을 받습니다. 어렵게 공부를 해 온 경험이 어린 학생들에게 좋은 멘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올해 2월에는 15년 노력의 결과물인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처음에는 교수가 목표였어요. 물론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것에 대한 민망함이 없는 것이 첫 번째인데, 그 목표는 어는 정도 이룬 것 같고…. 교수 임용이 또 다른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교수라는 직업이 아무나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조교를 하면서 알게 됐어요. 그 전에는 제가 직업으로 교수를 생각했지 학생들을 바라보며 교수를 생각한 것이 아니에요. 이제는 학생들이 ‘교수님으로 오세요’ 얘기하면 농담으로라도 그것은 아니라고 얘기해요. 이번 학기부터 강의도 접었습니다.”





 





이선영은 대학의 기능이 학문을 가르치는 것에만 있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사회로 나갈 수 있는 인성과 능력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게 지도하기에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얘기합니다.





 





“제 역할은 학생들이 공부를 여기에서 편하게, 다른 스트레스를 갖지 않고 자기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편하게 해주는 것이에요. 집에서 엄마의 역할을 학교에서 해주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대학의 조교들은 학사의 사무보조라는 본연의 업무 외에도 학생 지도, 취업지도, 실습강의, 기자재관리 등 일인 다역을 소화해야 합니다. 어떤 업무는 이선영의 적지 않은 나이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업무는 적지 않은 나이에 더해진 강의와 지도자의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운동선수입니다





 





“시험을 보면 처음부터 포기하는 친구가 있는 반면 본인이 풀 수 있는 문제까지 푸는 친구도 있고, 끝까지 문제와 씨름하는 친구도 있어요. 개인의 성향 차이 일수도 있는데…. 대부분의 엘리트 선수들은 졸아요. 운동을 그만두고 중도탈락 했을 때, 다시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그래서 일반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공부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정말 필요해요. 대부분 자기에게 필요한 내용에는 눈빛이 반짝반짝합니다. 나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관심이 없는 거죠. 현장하고 연계되는 것은 관심이 생겨요. 그런 관심을 모색하고 개발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합니다.”





 





이선영은 강한 동기부여의 기제가 있었습니다. 가족의 미래입니다. 여기에 선수시절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였던 경험은 공부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도와줬습니다. 위의 이유들이 모두 더해지면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삶의 전환과정을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들이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일반학생과 달리 학생선수는 운동과 공부를 병행해야 합니다. 어려운 조건입니다. 그리고 운동과 달리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가 쉽지 않습니다. 학생선수의 학습권 보장 강화는 바람직하나 그것이 학습능력 강화로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조기 기초학력 부진은 상급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공부에 대한 자신감 결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로탐색의 기회도 배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운동선수들의 은퇴는 사회적 기능의 단절이 아닙니다.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삶의 전환과정입니다. 선수들에게 그 점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사회가 그들의 전환과정을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매년 나오는 중도탈락 학생선수의 수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수업에 들어가고 책상에 앉아있는 것이 낮선 일입니다.





 





운동 중단 이후에 개인 환경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사진=이선영 씨 제공

#본 글은 농구전문잡지 점프볼 4월호에 조원규 칼럼니스트의 기고로 먼저 게재되었음을 밝힙니다.



  2018-06-21   조원규([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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