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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헌의 브러시백] 글러브만 4개, 롯데에 ‘정훈 조브리스트’가 떴다

일병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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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5 (목) 10:00

                           
| 롯데 자이언츠엔 어떤 포지션이든 소화하는 ‘벤 조브리스트’ 같은 선수가 있다. 2루는 물론 1루, 3루, 외야까지 모두 커버하는 다재다능한 멀티 플레이어 정 훈이다. 롯데 주전 2루수에서 이젠 슈퍼 유틸리티로 변신한 정 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배지헌의 브러시백] 글러브만 4개, 롯데에 ‘정훈 조브리스트’가 떴다

 
[엠스플뉴스]
 
만약 KBO리그 버전 판타지게임이 존재한다면, 롯데 자이언츠 정 훈의 수비 포지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을 것이다.
 
정 훈 1B, 2B, 3B, SS, CF
 
올 시즌 정 훈의 출전 일지를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정 훈의 시즌 첫 1군 출전 경기는 4월 29일 한화전. 이날 정훈은 3루수 글러브를 끼고 시즌 처음 선발 출전했다. 사흘 뒤인 5월 2일 KIA전에선 1루수 미트를 끼고 6번타자로 나섰고, 여기서 시즌 첫 안타를 2루타로 장식했다.
 
다음날인 3일엔 대주자로 투입돼 도루를 한 뒤, 9회말 돌아온 타석 때 김세현 상대로 2타점 끝내기 2루타를 때려내 영웅이 됐다. 4일에도 대타로 나와 마수걸이 홈런포를 때렸다.
 
9일 LG전에선 중견수로 교체 출전해 안타와 타점을 올렸다. 13일 KT 전에서 다시 1루수 미트를 낀 뒤 15일 NC전에선 한때 주 포지션이었던 2루수로 교체 출전했다. 그리고 17일 NC 전에선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해 2루타와 타점을 올렸다.
 
1루수, 2루수, 3루수, 중견수, 대타, 대주자, 지명타자. 거의 롯데의 ‘벤 조브리스트’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온갖 포지션을 오가며 종횡무진 활약하는 정 훈이다. 
 
“요새는 글러브만 4개를 갖고 다닙니다.” 정 훈이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조브리스트라니 당치도 않아요. 그보단 야구장비 판매인에 가깝죠. 글러브란 글러브는 다 갖고 다니니까요.”
 
내야수에서 외야수로, 타의로 시작한 정 훈의 변신
 
[배지헌의 브러시백] 글러브만 4개, 롯데에 ‘정훈 조브리스트’가 떴다

 
지금은 온갖 글러브로 꽉 찬 상태이지만,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정 훈의 가방 속 글러브는 단 1개뿐이었다. 2루수용 글러브. 정 훈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 연속 120경기 이상 출전한, 확고부동한 롯데 주전 2루수였다. 부산 팬들의 큰 환호도 받고, 때로는 심한 질타도 받았지만 조성환이 떠난 롯데 2루의 새 주인은 분명 정 훈이었다.
 
하지만 2016시즌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친 뒤, 2017년 큰 위기가 찾아왔다. 새로 합류한 외국인 타자 앤디 번즈가 2루에 자릴 잡으면서 정 훈의 출전 기회가 크게 줄었다. 스프링캠프 기간 주전 3루수 경쟁에도 뛰어들어 봤지만, 이 자리는 김동한과 신본기 등 후배들의 차지였다. 
 
냉정한 프로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훈은, 새로운 글러브를 들고 외야로 나가는 방법을 택했다.
 
“자의는 아니었습니다. 숫자로 따지면 자의는 1도 안 돼요.” 정 훈이 말했다. “솔직히 처음엔 쉽지 않았습니다. 자존심도 많이 상했어요. 빨리 그런 마음을 내려놓았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계속 ‘나도 할 수 있는데’란 생각을 마음  속에 갖고 있었습니다.”
 
외야수의 내야 전향에 비해, 내야수의 외야 전향은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다. 지난해부터 외야 수비 훈련을 시작한 정 훈도 비교적 순조롭게 외야 수비에 적응해 나갔다. 지난 시즌 정 훈은 12경기(3선발)에 중견수로 출전했고 34이닝을 소화했다. 실책은 하나도 없었다. 외야 전향 첫 시즌치곤 나쁘지 않은 결과다.
 
올해는 아예 내야보다 외야로 출전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7월 5일 현재 38경기 가운데 20경기가 중견수로 출전한 경기다. 선발 출전도 17경기 가운데 10경기에서 중견수로 나섰다. 외야 수비이닝도 104이닝으로 내야 수비이닝(75이닝)보다 훨씬 많다. 
 
“외야 수비가 아주 어렵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어요.” 정 훈이 말했다. “외야에 나가서 크게 긴장된다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물론 아직 처리하기 어려운 타구를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할 만합니다.”
 
조원우 감독도 정 훈의 외야 수비에 합격점을 줬다. 조 감독은 “정 훈이 계속 외야 수비를 준비했는데 잘해줬다. 원래 어깨가 좋고 포구 능력도 좋은 선수라 안정적으로 공을 처리했다”며 “멀티 포지션에 적응을 잘하고 있다”고 밝혔다. 
 
“솔직히 우리 팀 외야진을 봤을 때, 저는 내야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 훈의 말이다. “요즘 국내 외야수들 타격 능력이 정말 뛰어나잖아요. 우리 팀만 해도 전준우 형이나 민병헌, 손아섭이 자리하고 있어요. 20홈런이나 3할대 타율을 쳐 본 적이 없는 제가 살아남으려면 내야가 답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5월 중반 민병헌이 30일간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의외로 외야에서 자리가 생겼다. 정 훈은 5월 19일 두산전을 시작으로 23일 삼성전까지 4경기 연속 중견수로 선발 출전했다. 6월 초에도 5일부터 9일까지 5경기 연속 중견수로 선발 출전하며 민병헌의 빈 자리를 훌륭하게 채웠다. 
 
“주전 선수가 빠졌을 때 빈자리를 채우는 것, 그게 지금 제가 1군에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정 훈의 말이다. “주전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내야나 외야에 구멍이 났을 때 그걸 메꾸는 역할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멀티맨’ 정훈의 각오 “어떤 포지션이든 시켜만 주이소”
 
[배지헌의 브러시백] 글러브만 4개, 롯데에 ‘정훈 조브리스트’가 떴다

 
흥미로운 건 외야로 출전하면서, 최근 2년간 부진했던 방망이가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훈은 6월 5일부터 9일까지 5경기 연속 선발 중견수로 출전해 23타수 8안타 1홈런의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중견수로 출전한 경기에서 성적도 타율 0.304에 장타율 0.500으로 수준급이다. 시즌 타격 성적도 타율 0.268에 장타율 0.454로 2015시즌 이후 가장 좋은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다. 
 
“제가 저 스스로 가하는 압박이 많이 줄었습니다.” 정 훈이 말했다. “한창 주전으로 계속 나갈 때는 경기가 안 풀리면 타격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수비에 부담을 느낄 때가 많았어요.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성적이 떨어지면서 조금은 마음을 비웠습니다. 백지상태에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어요.”
 
시즌 초반 2군에 있을 때 아내가 해준 말이 정 훈을 깨웠다. “하루는 야구장이 너무 가기 싫은 거에요. 아내랑 얘기하는데 제게 그러더군요.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고. 처음 육성선수로 프로에 왔을 땐 1년만 하고 잘려도 좋다더니, 몇 년 주전으로 나가다 잠깐 못 뛰게 됐다고 그런 소릴 하느냐고 절 꾸중했습니다.”
 
정 훈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2군 후배들과 경쟁해 봐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어차피 경기에 못 나가는 건 똑같은 처지니까요. 거기서 잘해서 살아남아야 1군도 올라갈 수 있잖아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경기를 하니까, 야구가 다시 재미있더라구요. 경기에 계속 꾸준히 출전할 수 있단 것도 좋았구요.”
 
김승관 타격코치는 정 훈의 타격이 예년보다 좋아진 이유로 ‘스윙 궤적’을 들었다. “지난해엔 방망이가 너무 돌아서 나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올해는 마무리캠프부터 스윙 궤적에 신경을 쓴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실전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서, 조금씩 자신감을 얻는 것 같습니다.”
 
예전처럼 매일 선발 라인업에 포함되진 못하고 있지만, 정 훈은 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역할이든 마다하지 않고 전력을 다할 각오다. “선수는 팀이 이기는 게 무조건 1순위입니다.” 정 훈의 말이다. “제가 잘 치고 못 치고는 둘째 문제에요. 팀이 위로 올라가야 제 개인의 가치도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제한된 선수로 1군 엔트리를 꾸려야 하는 감독 입장에서, 정 훈처럼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는 슈퍼 유틸리티 요원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내야 외야 가리지 않고 소화하는 정 훈이 있기에, 야수 엔트리 하나를 줄이고 투수를 한 명 더 엔트리에 넣는 운영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비록 자의로 갖게 된 ‘멀티 포지션’ 능력은 아니지만, 이 능력을 통해 정 훈은 보다 가치 있는 선수로 거듭났고 팀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정 훈도 이를 잘 안다. “한 번을 나가든, 두 번을 나가든 찬스가 오면 안타를 치고 대수비로 나가면 잡아내는 게 제 역할입니다. 지금 우리 팀에 필요한 게 바로 그런 역할이죠. 어느 포지션이든 나가라고 하면 나가서 제 역할을 다 할 겁니다.” 정훈의 말이다. “글러브는 항상 준비돼 있습니다.”
 
배지헌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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