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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G의 농구용어사전] 당대 최고의 ‘슛쟁이’들 ① 국내선수

일병 new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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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3 (수) 08:50

                           

[MJG의 농구용어사전] 당대 최고의 ‘슛쟁이’들 ① 국내선수



 



[점프볼=민준구 기자] 농구의 가장 기본은 무엇일까. 패스? 드리블? 리바운드?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농구도 득점을 해야만 승리할 수 있는 스포츠다. 그러기 위해선 슛이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알아봤다. 국내·외에서 가장 슛을 잘 던졌던 선수들을 말이다.



 



슛(Shooting)



 



바스켓을 향하여 공을 던지는 동작을 말한다. 농구의 슛은 세트슛·점프슛·리바운드슛·탭슛·러닝슛·덩크슛 등 그 종류가 다양하며, 기술이 발달되어 있다. 슛은 거리·위치·방법에 따라 여러 형태의 역학적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몸의 조정과 팔꿈치·손목·손가락 등의 교묘한 협동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 필리핀을 강타한 ‘신동파 신드롬’의 주인공 신동파



 



농구를 ‘국기’로 삼은 필리핀은 중국과 더불어 아시아 최고의 농구인기를 자랑한다. 대표적인 예로 필리핀 농구 국가대표팀이 어느 곳에서 경기를 펼치든 대규모 응원단이 함께 할 정도.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전에서 약 2천 5백여명의 응원단이 몰려 마치 필리핀인 듯한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농구에 미친 필리핀에 ‘신동파’ 세 글자는 마치 신처럼 느껴진다. 1969년 제5회 방콕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필리핀을 상대로 50득점을 폭발시킨 신동파는 조국을 첫 아시아 정상으로 올려놓은 주인공이었다. 이를 계기로 신동파는 필리핀에서 ‘복’, ‘행운’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될 정도다.



 



이북 출신으로 휘문고와 연세대를 졸업한 그는 1967년부터 실업팀인 중소기업은행에서 활약했다. 190cm의 장신으로 코트 전체를 휘어잡았던 신동파는 아직까지도 한국농구의 전설로 남아 있다.



 



수많은 장점을 가진 신동파였지만, 그 중 최고로 꼽히는 건 바로 ‘슛’. 한국농구 ‘슛쟁이’ 계보의 시작을 알릴 정도로 그의 슛은 일품이었다. 신동파는 “고등학교 다닐 때 슛을 500개씩 던졌다. 100개 정도 던졌을 때 평균적으로 90개는 들어가더라.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99개가 들어갔다”고 말한 바 있다. 지독한 연습과 넘치는 열정이 실전에서도 연습과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비결이었던 것. 신동파는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이후 나선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대회에선 8경기에 나서 평균 32.6득점을 퍼부으며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3점슛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니 그의 기록이 더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MJG의 농구용어사전] 당대 최고의 ‘슛쟁이’들 ① 국내선수



 



‣ 설명이 필요 없는 ‘슛도사’ 이충희, 라이벌 故김현준



 



1960~70년대가 신동파의 시대였다면, 1980년대는 이충희가 계보를 이어갔다. 故김현준과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농구의 인기를 끌어 올렸던 그는 국내 팬들이 기억하는 최고의 슈터다. 182cm의 작은 신장이지만, 상대가 얼마나 크든 이충희에겐 큰 문제가 없었다. 가장 압권인 장면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 작은 한국선수가 2m 이상의 선수들이 즐비했던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38득점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영상이 남아 있어 그의 활약이 어땠는지 직접 볼 수 있다). 이충희는 이 대회에서 평균 22.9득점을 올리며 맹활약 했다.



 



사실 이충희는 타고난 천재형의 선수는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 단순히 농구가 좋아 엘리트 선수의 길로 접어든 그는 150cm대의 작은 신장으로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에 1000개씩 성공해야 연습이 끝날 정도로 노력하며 슛에 관련해 ‘슛도사’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이충희의 열정은 그칠 줄 몰랐다. 결국 송도고 3학년 시절엔 국내 최고의 선수로 올라서며 고려대와 현대전자를 거치게 된다.



 



정확한 슛을 바탕으로 득점기계가 된 이충희는 여러 차례 최다득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87년 12월, 이충희는 농구대잔치에서 명지대를 상대로 64득점을 기록한다. 이는 2011년 장동영(67득점)이 경신하기 전까지 농구대잔치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이전에도 50득점 이상을 종종 기록했던 이충희는 1984년에는 허재와 한기범이 있던 중앙대를 상대로 60득점을 퍼붓기도 한다. 이날 패배로 열 받은 허재가 머리를 삭발했다는 후문도 있다.



 



이충희의 활약은 국제대회에서도 이어졌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30득점을 올리며 중국을 꺾고 한국의 금메달을 이끈 이충희는 1986년 스페인 세계농구선수권대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45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는 세계대회 득점 역대 7위 기록이다.



 



이충희의 전매특허는 페이더웨이 슛. 키가 작은 그에게 안성맞춤인 슛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페이더웨이를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이가 없어 거의 독학으로 배웠던 그는 “슛이 잘 들어가니 갈수록 더 큰 사람이 막았다. 자연스럽게 스텝으로 물러나며 쏘니 그런 슛이 나오더라”고 말하며 비법(?)을 알려준 바 있다.



 



[MJG의 농구용어사전] 당대 최고의 ‘슛쟁이’들 ① 국내선수



 



‘전자 슈터’ 故김현준도 슛쟁이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다. 이충희와 라이벌 관계로 유명세를 떨친 그는 특유의 뱅크슛으로 국내농구판을 지배했다. 이충희가 농구대잔치 사상 최초로 개인 통산 4천 득점을 돌파했다면, 故김현준은 5천 득점을 돌파하며 6,328득점까지 기록한 가운데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사실 故김현준은 정통 슈터라고 보기엔 애매하다. 워낙 능력이 출중해 경기 운영에도 능했으며 개인 돌파 능력이 좋아 어떤 상황에서도 득점을 해줄 수 있는 선수였다. 오히려 멀티 플레이어로 보는 게 정확하다. 故김현준만을 바라보고 삼성전자 입단을 확정지은 문경은은 “이충희 선배님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양대 슈터였다. 어떤 자세든 던지면 들어갈 것 같았던 선수다. 당시 수비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칠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 대단하다고 느낀다”며 우상을 언급하기도 했다.



 



1999년 10월 1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국내 농구 팬들은 최고의 슈터라고 하면 ‘김현준’ 이름 석자를 떠올리곤 한다. 180cm대의 작은 신장, 농구 선수로서는 두꺼운 발목으로 좋을 것 하나 없는 신체조건이었지만, 열정 하나로 최고의 자리에 선 그를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 ‘람보 슈터’ 문경은 “될 때까지 쐈다”



 



현 SK 감독인 문경은도 신동파-이충희를 잇는 한국농구의 대표적인 슈터였다. 빠른 슛 동작과 깔끔하게 빨려 들어가는 3점슛은 한창 농구에 빠져 있던 기자를 더 깊게 끌고 들어갔다. KBL 역대 3점슛 성공(1,669) 1위, 득점(9,347) 4위 등 대기록을 가지고 있는 문경은은 한국농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MJG의 농구용어사전] 당대 최고의 ‘슛쟁이’들 ① 국내선수



 



연세대와 삼성전자를 거쳐 1997년 KBL 출범 후 1997-1998 시즌부터 삼성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한 문경은은 첫 해 24.9득점을 기록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다. 이후 신세기 빅스(현 전자랜드)로 이적한 문경은은 SK로 다시 팀을 옮기며 선수생활을 마치게 된다. 연세대와 삼성전자 시절 보였던 운동능력은 상실했지만, 슛 하나로 13년의 프로 생활을 했을 정도로 그의 슛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2004년 3월 7일 원주 삼보와의 경기에서는 한 경기 최다 3점슛 기록인 22개를 성공시키며 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은퇴 전까지 문경은은 평균 15.3득점을 기록하며 외국선수가 지배한 KBL에서도 자신만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냈다.



 



문경은은 “난 선수 시절에 될 때까지 슛을 던졌다. 슈터라면 성공률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물론, 슛감이 좋지 않을 때는 내 스스로 시험을 해봤다. 첫 번째가 안 들어가면 두 번째를 던져보고 그마저 들어가지 않으면 3번째까지 던졌다. 나를 지도했던 감독님들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잘해줄 걸 알았으니까(웃음)”이라며 자화자찬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 “득점이 필요해? 그럼 말해” ‘변코비’ 변연하



 



여자농구의 대표적인 슛쟁이는 바로 변연하다. 이에 앞서, 김화순, 김영옥, 박정은, 김은혜 등 많은 선수들이 후보에 오를 수 있으나, 기자는 변연하를 꼽고 싶다. 중학교 시절까지 센터였던 변연하는 엄청난 노력 끝에 슛쟁이가 될 수 있었다. 단순히 슛만 잘 던졌던 게 아니다. 선수 말년에 패스에 눈을 뜨며 WKBL 역사상 포워드로서는 최초로 어시스트상을 받았다. 돌파 능력까지 탁월했던 그는 농구 인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여자농구선수다.



 



[MJG의 농구용어사전] 당대 최고의 ‘슛쟁이’들 ① 국내선수



 



동주여상에 입학한 변연하는 차명신 코치의 제안으로 포지션 변화를 줬다. 더 이상 키가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차명신 코치는 변연하를 골밑이 아닌 백코트에 세운 것이다. 변연하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농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외곽에 나왔다. 3점슛이 안 되니 죽겠더라. 그 때만큼 노력했던 적도 없다. 새벽 1시 전에 체육관에서 나온 기억은 없다. 2시 넘어서까지 슛을 던지며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 때 만들어진 변연하의 슛 폼은 은퇴할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독한 훈련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프로 무대에 들어설 때도 변연하의 노력은 계속됐다. “30대 이전 까지만 해도 하루 1000개의 슛 연습을 해야 잠자리에 들었다. 야간훈련까지 소화하고 매일 그렇게 던지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연습량을 줄였는데 연습도 중요하지만, 감각 유지가 정말 중요하다.” 변연하의 말이다.



 



변연하의 트레이드 마크는 스텝백 3점슛. NBA에서 스테픈 커리가 애용하는 것으로 한국 남자농구선수들 중에 스텝백 3점슛을 던질 수 있는 이는 없다. 드리블을 치다가 어느새 뒤로 빠져 거리를 둔 채 슛을 던지는 변연하의 기술은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었다. 변연하와 슛으로 쌍벽을 이룬 박정은도 현역 시절에 보여주지 못한 기술이다.



 



[MJG의 농구용어사전] 당대 최고의 ‘슛쟁이’들 ① 국내선수



 



‣ 타고난 재능? 피나는 연습이 그들을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인물들 이외에도 현역 최고의 슈터로 불리는 문태종과 조성민도 한국농구의 슛쟁이 계보를 잇는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최고의 슈터로 불릴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슈터에게 있어 재능은 분명 필요한 요소다. 노력만으로 신동파, 이충희, 문경은과 같은 선수들이 나타났다면 다른 선수들은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소리와 같다. 그러나 재능을 뛰어넘는 피나는 연습이 세 사람을 만든 건 사실이다. 타고난 재능과 함께 꾸준히 자신을 채찍질했던 것이 시너지 효과를 내 만들어진 결과였던 것이다.



 



이충희는 “슛 연습을 많이 하면 손끝에 느낌이 딱 온다. 슛의 경지에 올랐을 때 느낌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다. 1000개씩 성공해야 하는 훈련을 3~4개월 정도 하니 눈을 감았는데 림이 보이더라. 한 마디로 눈을 감고도 들어갔을 정도였다”고 말한 바 있다. 문경은도 “지금 슈터라고 불리는 선수들이 한 가지 알아야 될 건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점슛을 던지면 ‘3개 중에 1개는 들어간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 믿음은 피나는 연습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또 “연세대 때 나만 따로 훈련한 적이 있다. 베이스 라인에 빈 타이어를 놓고, 이를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슛 연습을 했다. 정말 힘든 훈련이었지만, 적응되면 이보다 더 좋은 건 없다”고 덧붙였다.



 



故김현준은 선수 시절, 신장과 운동 능력 부족을 끊임없는 훈련으로 보완했다. 이성훈 KBL 사무총장은 “김현준은 하루에도 3~4번씩 3~4시간의 운동을 반복했다”고 전했다. 박종천 KBSN 해설위원도 “연세대 뒤에 있는 무악산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죽기 살기로 뛰었다”고 말하며 당시를 회상하곤 했다.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리스트 김화순도 “본 훈련이 끝나도 7~800개의 슛 연습은 기본으로 했다. 쉬는 날도 빼먹지 않고 말이다. 목표하는 개수가 끝날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꾸준하게 연습하면 성공률은 올라간다”고 일침을 가했다.



 



[MJG의 농구용어사전] 당대 최고의 ‘슛쟁이’들 ① 국내선수



 



유럽에서 잔뼈가 굵은 문태종도 전성기 시절은 물론, 나이가 어느 정도 찬 뒤에 들어온 국내에서조차 반복 훈련을 거듭했다.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스쿼터와 런지를 많이 했다. 60kg로 12개, 100kg로 10개, 108kg로 5개씩 2세트를 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역대급 흉작 드래프트로 소문난 2006년 KBL 드래프트에서 8순위로 지명된 조성민도 재능보단 전창진 감독의 조련 아래 탄생한 대기만성형 선수였다. 물론, 한양대 시절부터 기대 받는 유망주였지만, 선천적인 재능보다 후천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국내 최고의 슈터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처럼 위대한 선수들을 만든 건 끊임없는 노력과 피나는 연습이었지, 타고난 재능만은 아니었다. 현재 KBL은 물론, WKBL 선수들까지 경기 전 연습을 하는 이들은 많다. 그러나 얼마나 자신에게 시간을 투자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공짜로 얻어지는 영광은 없다. 수많은 전설들이 해왔던 것처럼 자기만족이 아닌 더 발전할 수 있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슛이란 농구라는 스포츠에선 기본이다. 득점을 많이 해 승리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슛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슛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따라 그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점프볼 Choice



 



손대범 편집장  이충희, ‘슛도사’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렸던 선수.



이원희 기자  변연하, 클러치 상황만 되면 그녀가 뜬다.



강현지 기자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문경은!



민준구 기자  이충희, 한국농구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슛쟁이’ 그 자체



 



# 사진_점프볼 DB, KBL, WKBL 제공, 신동파 선생, 대한민국농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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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상사 항상양지로가자

2018.01.03 23:14:45

국농은 어짜피 양궁농구해야 하니까 야투율 좀 높이자.....진짜 여농 니네는 밥쳐먹고 그것만 하는데 일부러 그러냐??
왜그러는데?

신고를 접수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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