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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일반] [P-TODAY가 만난 사람] '4선 의원' 김영환, '시'에 길을 묻다
기사입력 : 2014.06.20 (금) 11:13 | 최종수정 : 2014.06.20 (금) 11:18 | 댓글 0
 [P-TODAY가 만난 사람] '4선 의원' 김영환, '시'에 길을 묻다 취재진에 "앞으로 계속 하고 싶은 일은 시를 쓰는 것"이라며 미소 짓고 있다. /국회=임영무 기자">
'시인' 새정치민주연합 김영환 의원이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집무실에서 <스포츠서울닷컴> 취재진에 "앞으로 계속 하고 싶은 일은 시를 쓰는 것"이라며 미소 짓고 있다. /국회=임영무 기자

[스포츠서울닷컴ㅣ오경희 기자] '시인 김영환.'

새정치민주연합 김영환(59·4선·안산 상록구을) 의원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는 '치과의사' 출신, 제1야당의 4선 중진의원이란 타이틀보다 '시인'이란 수식어에 마음이 두근거린다. 해야 할 몫의 '경중'을 따지는 의미는 아니다. '시 쓰는 국회의원' 김 의원과의 만남은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그의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직업으로는 치과의사가 체질에도 맞고 안정도 되지만(웃음) 제가 가장 즐겁고, 앞으로 계속 하고 싶은 일은 시를 쓰는 거예요. 개인적인 얘기지만 행정이랄까 정치 이런 부분은 허세가 많고, 지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으니까요."

시를 가슴에 품은 것은 1973년 유신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때였다. 연세대 치의학을 전공한 그는 본과 3학년 때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음식점 주방장이었던 아버지의 장남으로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서 태어나 치과의사를 꿈꿨고, 고등학교 졸업 후 상경했다.

서울 구치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하루 한편씩 시를 외우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작은 못을 구해 펜 삼아, 차디찬 회색 벽을 원고지 삼아 시를 써나갔다. 시는 '치유'였다.

"민주화운동으로 투옥하던 중 작은 못으로 벽에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무료함을 달래려던 것이었지만 시가 완성될 때의 희열을 경험한 뒤 꾸준히 시를 쓰게 됐습니다."

1979년 광복특사로 석방된 후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지만 정상적인 학교생활은 어려웠다.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졌고, 당시 복학생대표자협의회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또다시 구금될 상황에 처했다.

수배자로 쫓기며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삶의 굴곡마다 시를 썼다.

"자식이 웬수라던 불화의 십년 / 나는 하는 일마다 그의 가슴을 찔렀다.(중략) / 그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날 밤 잠든 내 손을 잡고 당신 손으로 호스를 빼고는 내 곁에 영원히 누웠다."('임종' 중에서)

"이제 졸업입니다. /아버지 5년 다녀도 못한 졸업 이제야 하게 되었습니다(중략)/평생 당신 소망이었던 사각모 쓰고 가운 입은 졸업이겠네요." ('아버지에게' 중에서)

 [P-TODAY가 만난 사람] '4선 의원' 김영환, '시'에 길을 묻다
김 의원은 대학에 입학한 지 15년 만에 졸업한 후 서른세 살부터 치과의사의 길을 걸었다./김영환 의원실 제공

대학에 입학한 지 15년 만에 졸업한 후 치과의사의 길을 걸었다. 그의 나이 서른세 살이었다. 그해 즈음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1987년 '따라오라 시여'라는 제목의 시집을 시작으로, 여러 작품활동에 매진했다. 이 시집에 수록된 '단순조립공의 하루'는 민중가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96년 그의 이름 앞엔 '정치인'이란 수식어가 하나 더 생겼다. 15대 총선에서 제도권 정치에 입문한 뒤 재선(16대)에 성공했고, 이후 17~18대 총선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18대 때 치러진 2009년 10·28 재보선에서 안산을에 출마, 당시 한나라당 송진섭 후보를 제치고 5년 6개월 만에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 오뚜기처럼 제2의 정치인생이 시작됐다.

19대 총선에서도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59.58%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 4선 고지에 올랐다. 두 번의 당선과 두 번의 낙선, 그리고 다시 두 번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정치인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삶의 끝에 '시'가 있길 희망한다. '치과의사'와 '시인' 그리고 '정치인' 가운데 '어떤 타이틀이 가장 좋냐'고 묻자 '시인'을 첫손에 꼽는다. 물론 정치인으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해 뛰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다는 것을 전제로 내놓은 답이다.

최근엔 세월호 침몰 사고로 못다 핀 단원고 학생들을 위한 '추모시'를 썼다. 시로 삶의 치유를 받았듯, 상처받은 유족과 국민들을 위로하고 싶다. 지난 4월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 공동대책위원장을 맡아 진상 규명을 위해 뛰고 있다.

다음은 <스프츠서울닷컴>에 처음으로 공개한 추모시 '복사꽃 핀다' 전문이다.

<복사꽃 핀다>

팽목항에 비 내리고 복사꽃 핀다

거친 파도 맹골수도에 갇혀서도 서로의 손 꼭잡고
"미처 말못할까봐 보내논다. 엄마 사랑해"

끝끝내 너희들 곁을 지켜낸 선생님들
어둠속에서 서로서로 부둥켜안고 흔들리지 않았다.

어둠바다 흩어진 252개의 꽃잎들
정조시간(靜潮時間)마다 다시 모인다.

팽목항에 봄이 오고 복사꽃 핀다

마지막이라도 너희 얼굴 외롭지 않았다.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어둠속에서 복사꽆 핀다

지난 겨울은 달콤했으나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추위 속에서 엄마의 사랑으로 싹트고 아빠의 땀방울로 망울졌으니

모두 버리고 사랑만 남은 너희들
이제 살아남은 자에게 사랑은 의무다

너희들은 이제 싸늘하게 식은 몸을 덮혀갈 것이다

뛰어놀던 단원고 교정에 봄이면 봄마다
복사꽃 핀다

발을 붙들어 맨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도 끝이 났다
애타게 기다리던 객실에는 구조의 손길이 와 닿지 않았다

그리하여 너희는 죽음의 그림자를 만났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에게 사랑의 봄볕을 남겼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11시 20분
사랑만 남은 너희들은
대한민국의 복사꽃으로 부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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